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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492]게으름에 대한 찬양④_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는 이유

by bandiburi 2021. 12. 11.

(출처: flickr)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 15편의 주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네 번에 걸쳐 나눠서 정리했다. 마지막 편에서는 나머지 글에 대한 느낌과 주요 발췌 글을 모았다. 버트란드 러셀의 글은 하나하나가 역사적 사실을 예로 들며 그의 성찰한 의견을 기록한 것이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 문장이 많았다. 

 

그래서 퇴근하고 밤시간을 이용해 책을 읽다 보면 집중하지 못해 동일한 문장 주위에서 몇 번을 방황하기도 했다. 그래서 출근 전 1시간 정도 새벽시간을 이용해 읽기도 했다. 야간과 새벽은 정신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달랐다. 새벽에는 생각이 오로지 책의 내용에만 몰입할 수 있어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우리가 사는 것보다 파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된 심리적 근원은 기쁨보다 힘을 더 좋아하는 데 있다. 물론 이것이 보편적인 특징은 아니다. 짧고 즐거운 인생을 좋아하는 낭비가들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경쟁시대를 대표하며 정력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겐 이러한 특성이 뚜렷하다. (83)

 

금융과 산업을 한 덩어리로 묶어 생각하도록, 따로이 금융 부문의 이익만이 아닌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도록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금융과 산업을 따로 떼어 놓으면 금융이 산업보다 막강하다. 그러나 금융의 이익보다 산업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에 좀 더 가깝다. 과대해진 금융 세력으로 인해 세계가 위기에 처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소수가 다수를 능가하는 힘을 획득하는 경우 그들은 어김없이 다수를 지배하는 일정한 미신의 도움을 받아 왔다. (86)

 

세 가지 인상 깊었던 부분을 정리해보자. 

첫째, 1935년에 출간된 책임에도 거의 80년이 지난 현재에도 유효한 글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현대 사회의 획일성'이란 부분이 미래를 예견한 글처럼 다가왔다. 당시에 라디오와 같은 기술의 산물들로 인해 사람들의 생각이 다양성을 잃고 획일화될 것을 우려했다. 멍청하게 만든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은 그가 우려했던 대로 살고 있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수시로 뉴스나 유튜브 방송을 볼 수 있고, 더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한쪽에 치우친 생각을 가지기 쉽다. 확증편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다양한 사람과 교류하고 다양한 독서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미신의 도움이 없다면 이러한 무기들 중 어느 것도 충분치 못하다. 경제학은 모든 남자나 여자, 아이들에게까지, 모두에게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이 과목을 가르치는 일이 거의 없으며 대학에서조차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배우고 있을 뿐이라는 건 놀라운 사실이다. 게다가 그 소수조차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은 한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한다. (87)

신을 현세 생활의 필요보다 하위에 둠으로써 자신들의 믿음에 의혹을 던진다. 그들은 신도 안식일처럼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교회를 현대 이상주의의 기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 데는 사회적 이유들도 있다. 교회들은 기부를 통해 재산을 모으는 일에만 급급했다. 게다가 젊은이들이 보기엔 아무 해도 없을 듯한 여러 가지 쾌락들을 비난하고, 회의론자들이 보기엔 불필요하게 잔인해 보이는 많은 고통을 강제하는 억압적인 윤리에도 문제가 있다.(94)

현대의 많은 발명품들은 사람들을 멍청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라디오, 유성 영화, 독가스 따위가 그러하다. (96)

 

둘째, 파시즘에 대한 저자의 반감과 국가 사회주의로 가야 할 당위성에 대해 공감하게 되었다.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으로부터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어떻게 파시즘이 성장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이전에 접해 보지 않았던 이야기의 연결이라서 재미있었다. 파편적으로 들었던 역사적 인물들이 이렇게 이어질 수 있구나 싶었다. 결국 파시즘이란 것이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소수 권력자,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체제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볼 수 있겠다. 
스피노자가 뭔가를 믿었을 때 그는 자신이 신의 지적 사랑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처럼 인간은 경제적 동기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거나, 프로이트처럼 지수 법칙이나 홍해의 동물군 분포에 대한 믿음의 기초가 되는 것은 성적 동기라고 믿는 게 현대의 인간이다. 어느 경우든 간에 현대인은 스피노자와 같은 환희를 맛볼 수 없을 것이다.(98)

 

교육과 민주주의와 대량 생산이 등장하기 전까지 어느 곳에서나 지식인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수뇌들이 쓰러졌더라도 영향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지식인들은 대단히 달라진 상황에 처해 있다. 선전가가 되거나 법정의 어릿광대가 되어 어리석은 부자들에게 서비스를 팔 마음이 있다면야 좋은 일자리와 높은 수입을 확보하는 것이 결코 힘들진 않다. 대량 생산과 초등 교육으로 인해 어리석음이 문명의 발흥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견고해졌기 때문이다. (99)

 

대규모 조직의 증가로 현대의 인과 관계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원거리적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조직들을 통제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낳을 결과의 100분의 1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다. (101)
셋째, 어느 계층에서든 경제적 두려움으로 안전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부를 쌓고 투자한다. 이 두려움으로 인해 여가를 즐겨도 개운치 않고 일할 때도 초조하다고 한다. 노후자금에 대한 불안, 자식 세대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지 않을까 불안 등으로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도 초조해하고 있다. 러셀의 지적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이 경제적 두려움이란 것을 실체가 무엇일까. 얼마를 가져야 해소될까. 단순히 돈의 액수를 보기 전에 안심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상태가 더욱 중요하다. 삶의 일과 돈보다 우선이다. 삶에 대한 사색과 빈둥거림이 필요한 시기다. 

 

노르웨이와 시칠리아는 둘 다 옛 전통을 지니고 있다. 또한 기독교 이전에 기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구체화한 종교가 있었다는 것. 그래서 이 두 나라에 들어온 기독교는 매우 다른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얼음과 눈을 무서워했다. 시칠리아인들은 용암과 지진을 두려워했다. 지옥은 남부의 기후에서 만들어진 개념인데 만일 노르웨이에서 창안되었더라면 아마 혹한의 의미를 갖게 됐을 것이다. (108)

 

사고나 여론이 획일화되는 것은 물질적인 생활 기구가 획일화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대의 발명품들이 가져오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여러 개의 작은 단위들로 나누어 생산할 때보다 하나로 통합해서 대규모로 생산할 때 비용이 더 절감된다. (109)

 

프랑스도 미국 못지않게 민주적인 나라지만 이런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사든, 법률가든, 성직자든, 정부 관료든, 프랑스에선 모두들 제각각의 유형들이다. 다른 직업에 대해 우월함을 내세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직업마다 그 나름의 전통과 기준이 있다. (112)

 

네이버 뉴스를 종종 헤드라인만 보며 어떤 이슈들이 있는지 살피곤 한다. 부동산, 투자, 대기업 오너, 여야 정치인들 이야기가 중심이다. 왜 이런 기사를 올렸을까 한심해 보이는 글이 적지 않다. 그만큼 이 글을 선택한 언론사들의 의도가 있다고 본다. 부동산이나 주식을 통해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장한다. 노후준비에 대해 필요하지만 과도하다. 공공연하게 기업 오너의 근황을 자세히 보도한다. 균형 잡힌 언론을 기대한다

 

거대한 인구가 제한된 공간에서 생존하려면 과학과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교육은 적어도 최소한의 필요한 과학과 기술들을 후세에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최대의 자유를 허용하는 교육은 자비심과 자기 조절, 훈련된 지성이 어느 정도 뒷받침된 상태에서만 성공할 수 있으며, 이러한 요건들은 모든 충동을 그대로 방치해 두는 데서 생겨나기란 힘들다. (125)

 

가르칠 때도 아이가, 자신이 배우고 있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그 지식이 진실일 때 말이다. 학생이 적극적으로 협조할 때 학습의 속도는 두 배로 빨라지고 피로감은 반으로 줄어든다. 이 모든 것들이 많은 자유가 필요한 명백한 이유가 된다. (127)

 

게으른 부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녀들을, 일이 필요한 것이라는 의식도 없고 모든 일을 열심히 하는 습관들도 없는 아이들로 키운다면 언행이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 (128)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책이다. 몇 번을 반추하며 읽고 1935년의 상황을 고려해서 받아들여야겠다. 하지만 현재도 적용할 수 있는 점이 많다는 점에서 이 책은 시대를 넘어 스터디셀러가 될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호의라는 충동이 자연스럽게 올바른 결정으로 이끌어 갈 것이고 당신이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이가 느낀다면 어떤 결정이든 대체로 올바를 것이기 때문이다. 규율이란 제 아무리 현명한 것이라 해도 애정과 접촉을 대신할 수 없는 법이다. (131)

그리하여 그는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을 구별하는 장치를 만들어냈다. '순수' 이성은 입증될 수 있는 것으로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에 비해 '실천' 이성은 덕에 필요한 것으로 대단히 많았다. 물론, '순수' 이성은 순수하게 이성인 반면, '실천' 이성은 편견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138)

 

파시즘이 자라 나온 사상의 원조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들이 있다. 그들은 감정이나 인식보단 '의지'에서 선을 추구한다. 행복보단 권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 논쟁보단 힘을, 평화보단 전쟁을, 민주주의보단 귀족주의를, 과학적 공정성보단 선전을 선호한다. 그들은 기독교적 엄격함에 반해 스파르타식 엄격함을 부르짖는다. 다시 말해 엄격함을, 덕을 쌓거나 내세에서의 행복을 위한 자기 단련의 수단으로 보는 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본다.(143)

 

하나의 요인은 능력 있고 힘 있는 사람들 가운데 공동체의 이해와 반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다양한 집단 히스테리들을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안전하게 유지하려 한다. 반공산주의, 외국 군사력에 대한 공포, 경쟁국에 대한 증오가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157)

 

파시즘은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반민주적이다. 절대 다수의 절대 행복을 주요 목표로 인정하지 않는 대신, 특정 개인이나 국가, 계층들을 선택해서 '최고'라고 내세우며 배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선택된 자들에게 봉사하도록 무력에 의해 강요된다. (166)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인류가 이러한 기형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선 자유로운 성장, 자기 마음대로 해보기, 훈련되지 않은 자연스런 삶이 필수적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인내가 요구되는 궁극적인 이유인 것이다.(171)

 

최하층에서부터 최상층에 이르는 모든 계층에서 경제적 두려움이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밤에는 꿈까지 지배한다. 따라서 일할 땐 초조하고 여가를 즐길 땐 개운치가 않다. 이렇게 늘 공포에 시달리는 상태야말로 문명 세계의 넓은 지역을 휩쓸고 있는 광기서린 분위기를 유발하는 주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부에 대한 욕망은 대부분 안전에 대한 욕망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늙고 쇠약해졌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또는 자식들의 사회적 계급이 추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돈을 무으고 투자한다. (중략) 경제적 안정은 문명 사회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데 있어 전쟁 방지책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187)

 

범죄자가 아닌 한 모든 사람이 봉급을 받게 될 것이고 육아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므로 경제적 불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내들이 남편에 의존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부모의 부족함 때문에 아이들이 심각하게 고통받는 경우도 방치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국가에 의지해 살 뿐,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은 사라질 것이다. (202~203)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농부보다 목동이 덕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전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은 현대에 들어서까지도 주로 농경에 기초해 있었다. (212)

 

사람은 언제라도, 자신이 살아가는 데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고, 자신의 죽음이나 아내 혹은 아이의 죽음이 이 세상에서 그를 흥미있게 만드는 모든 것을 끝장내는 것은 아니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성인으로 살아가면서 진정 마음으로부터 이러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으려면 청년기에 아낌없는 열정으로 젊음을 불태우고, 자신의 인생을 걸 만한 직업을 가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236)

 

청년기에는 사사롭지 않은 많은 관심사들이 젊은이들 앞에 제시되어야 하며 자기 외부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놓고 훈계하는 방법이 아닌 암시의 방법으로) 깨쳐 주어야 한다. 불행이 닥쳤을 땐 아직도 살아야 할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견뎌내도록 가르쳐야 한다. (239~240)

 

우리의 일상 생활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인공적이다. 이로 인해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많다. 안전한 자신의 영토 안에서 인간은 점점 더 사소해지고, 교만해지고, 약간씩 미쳐간다. (245)

독서습관 492_게으름에 대한 찬양④_버트란드 러셀_2016_사회평론(2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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