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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456]라면을 끓이며_글은 관찰과 배움과 고뇌의 결과_김훈 산문

by bandiburi 2021. 10. 12.

2018년 블로그를 시작했다. 나의 글을 어디서나 조회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PC로 입력한 글을 스마트폰이든 아이패드든 검색해서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거칠었던 글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다듬어졌다. 의도적으로 맞춤법이나 오타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매주 책을 읽고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며 느낌을 글로 정리한다. 매번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더 그럴듯하게 표현할 수 있는데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글 쓰는 사람들의 힘을 작은 차이에서 새삼스럽게 크게 느낀다.


섬의 유모차들은 모두 물건을 실을 수 있도록 바구니를 붙였고, 헐거워진 이음새를 고무줄로 고정시켰다. 유모차는 아이와 노인 사이를 건너가면서, 용도 변경에 따른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 유모차도 2톤짜리 어선처럼 불가결한 것들만으로 구성되어서 무거운 것들을 가벼운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섬에서, 소형어선의 엔진과 작은 물고기의 내장과 노인들의 유모차는 동일한 계통발생에 놓여 있다. (68페이지)


동일한 사물을 보고, 유사한 경험을 했음에도 김훈의 산문집에서  그의 글은 왜 이렇게 풍성한 것일까. 그는 책의 여기저기에 글쓰기가 즐거움이 아닌 삶의 고뇌와 애씀이 녹아들어 있다고 고백한다. 글로 풀어내는 노력을 기자 시절부터 몇십 년을 해왔으니 오죽하겠는가. 조금이라도 그의 글을 닮아가면 좋겠다.

 



나는 놀기를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한다. 나는 일이라면 딱 질색이다. 내가 일을 싫어하는 까닭은 분명하고도 정당하다. 일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부지런을 떨수록 나는 점점 더 나로부터 멀어져서, 낯선 사물이 되어간다. 일은 내 몸을 나로부터 분리시킨다. 일이 몸에서 겉돌아서 일 따로 몸 따로가 될 때, 나는 불안하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소외된 노동으로 밥을 먹었다. (127)

 


"11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소수림小獸林에 장사 지내고 존호를 소수림왕이라고 하였다"는 대목은 내각 읽은 <삼국사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에 속한다. 소수림은 어디인가, '작은 짐승들이 모여 사는 숲'이라는 뜻으로 봐서 아마도 국내성 왕궁에 딸린 동물원이 아닐까. 고구려의 왕들은 죽어서 강가에 묻히거나 산꼭대기 봉수대에 묻히거나 '작은 짐승들이 사는 숲'에 묻혀서 한 줌의 흙을 국토에 보탰고, 그 묻힌 자리의 지명에 불멸의 지위를 부여했다. 고구려인들의 강토 사랑은 그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왕들은 죽어서 자신의 존호를 국토에 포개었다. (110~111페이지)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지만 지나가고 잊혀지는 것이 아쉬워서 기록으로 남기고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저자는 라면을 보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이해와 상황에 대해 풀어내는 폭과 깊이가 다르다. 바퀴에 대해서도 고구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넘나 든다. 역사에 대한 이해와 관심도 중요하다. 뭔가를 쓴다는 것이 단순히 내가 알고 있는 정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관련 책을 보고 배우고 소화한 뒤에 쓴다.


북경과 선양을 다녀온 박제가(1750~1805)는 바퀴에 열광했다. 그의 저서 <북학의>는 첫 페이지부터 바퀴에 대한 예찬으로 시작한다. 그는 바퀴의 문화적 경제적 사명의 발견자였다. 그는 바퀴의 이용이 단절된 조선의 현실을 개탄했고, 연결된 도로를 바퀴로 소통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진언은 배척되었다. 박제가의 시대에까지 고구려의 바퀴는 버려져 있었다. (114~115)




작가는 공학도가 아니지만 배의 구조에 대한 책을 찾아보고 <칼의 노래>를 썼다고 한다. 학창시절의 전공이 배움의 전부가 아니라 내가 배우고자 하는 분야가 나의 전공이 된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다. <삼국사기>를 읽고, 이제마에 대해서 읽고 관련된 글을 쓴다는 점은 본받을 점이다.

딸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 딸아이는 나에게 핸드폰을 사주었고 용돈이라며 15만 원을 주었다. (중략)

그 아이는 나처럼 힘들게, 오직 노동의 대가로서만 밥을 먹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139)

 


평소에 글을 조금씩 쓴 것이 꽤 쌓였지만 아직은 기초를 쌓는 과정이다. 책을 1000권 정도 읽으면 이전에 모아놓은 독서기록을 거꾸로 반추하며 나만의 작은 역사를 남길 예정이다.

그날 밤(* 독자 추가: 김지하가 출소되던 날) 나는 신문사로 돌아가 마지막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박경리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나는 다만 백기완의 출감 모습만을 추가로 썼다. 나는 박경리에 관하여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말해서는 안 될 일인 것만 같았다. 새벽 2시께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잠자다 일어난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기가 추웠겠네요."라고 말했다. 춥고 또 추운 겨울이었다. (408~409)


고 박경리 작가의 사위가 김지하 시인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기자로서 김훈이 1975년 추운 겨울에 김지하가 출소하는 것을 취재하는 중에 그의 장모인 박경리 선생이 손주를 등에 업고 멀리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하지만 그는 이 사실은 어디에도 쓰지 않았다. 이 글을 통해 알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추운 겨울의 느낌과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이 마음을 뜨겁게 만든다.  

슬픔과 분노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는 것은 경제 살리기에 해롭다는 것이 그 혐오감의 주된 논리였다. 세월호에서 놓친 골든타임이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으로 살아났고 거기에 이념의 날나리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사실 4.16 참사 이후에 경기는 장기침체에 빠졌고, 정부의 부양책은 힘을 쓰지 못했다. 모두들 슬프고 분하면 경기는 침체되는 것이니까. 슬픔과 분노가 경기침체의 원인이라는 말도 결국은 동어반복이다.

어찌 헌옷을 벗듯이, 헌신짝을 벗어버리듯이 마음의 일을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인가. 돈 많고 권세 높은 자들이 큰 죄를 저질러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형량을 줄여서 선고하고, 형기중에도 특별사면, 일반사면, 집행정지, 가석방, 병보석으로 풀어주는 무법천지를 나는 자유당 때부터 보아왔고 이 무법천지는 모두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죄형법정주의는 무너졌꼬 경제는 합리적이고 규범적인 토대를 상실했다.

재벌의 불법을 용인해야 경제가 살아나고, 정당한 슬픔과 분노를 벗어던져야만 먹고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말은 시장의 논리도 아니고 분배의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속임수일 뿐이다. (165)


세월호 사고 1주년이 지난 시점에 작가는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아픈 마음을 드러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의 상황이나 관련된 글을 보면 내 마음이  아프다. 이제는 나의 세 자녀도 고등학교 2학년을 지났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어른들의 말에 순종한 것으로 캄캄한 바닷물속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어른들은 반성해야 했다. 하지만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경제를 운운하며 제대로 된 책임도 지지 않고 어물적 넘어가려고 했다. 저자는 이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통쾌했다. 사람으로서 사람다움이 있어야 한다. 물질도 필요하지만 사람이 먼저인 것이다.

 

그러나 드러남과 보여짐이 완벽하게 분리될 때, 여자들의 자유의 자리가 확보될 수 있을까. 여자들은 아플 때 아파 보일 자유와 지칠 때 지쳐 보일 자유와 나이 먹어서 늙어 보일 권리가 없는 것일까. 오십이 넘어서도 아내와 외출을 하려면 화장을 마칠 때까지 삼십 분 이상을 망연히 기다려야 한다. 4세기 신라 무덤 속 여자들의 화장품까지 생각하면서.(236~237)



모든 연장은 손의 연장延長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연장은 손의 수많은 기능들을 세분해서 극대화한다. 손은 연장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간다. 모든 무기와 악기도 손과 몸의 연장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모든 관악기는 인간의 호흡의 연장이고 모든 현악기는 팔의 연장이다. 몸이 악기를 울리게 하고, 손이 그 울림에 떨림의 무늬들을 새겨 넣는다. 손의 꿈은 무기와 악기와 연장을 통해서 세계를 개조하는 일이다. (281)


좋은 책은 읽고 나면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책도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함석헌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싶고, 삼국유사와 고구려 왕들의 존호에 대해서도 파헤치고 싶고, 김훈의 책을 필사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간이다.  


여러 사람들의 고향은 이제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위태로운 고향은 여전히 탄탄하게 땅에 뿌리박혀 있었다. 정부가 이제 추곡수매정책을 포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또 고향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떠난 사람들은 또다시 어느 객지에서 새로운 고향을 만들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315)

 

고형렬의 산문 <은빛 물고기>는 연어의 생로병사에 대한 관찰과 명상이다. 3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글의 흐름은 깊고 느리다. 고형렬의 글은 기나긴 독백으로 읽힌다. (391)

 


독서습관456_라면을 끓이며_김훈 산문_2019_문학동네(2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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