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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강의

[강의]최진석 교수_질문이 있고 목적이 있는 삶_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190918)

by bandiburi 2019. 9. 21.
 유튜브 강의를 듣고 철학교수지만 말씀을 참 공감이 가게 잘 하신다고 생각했던 최진석 교수를 회사 초청으로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침 강의실로 갔다. 짧은 스포츠 머리의 최 교수는 금년이 환갑이라고 한다.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되었다고 시간이 빠름을 설명한다. 
 단조로운 톤으로 강의를 진행해 아침 자장가처럼 들은 분도 있었겠지만 내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옥같이 들렸다. 열심히 스마트폰으로 요약 정리를 했다. 아래는 정리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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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내용 요약>

 40대나 50대는 일에 대한 수준이 높아져서 왜 사는지?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양적이고 기능적인 질문에서 본질적 질문으로 변한다. 살아가면서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를 통해 나와 사회의 진화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회의 비전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으로는 경전들이 있는데 예로는 시경 서경 도덕경 남화경(장자) 등이 있겠다. 

경영 management에서 말고삐를 매니지라고 하는데 어떤 비전을 잡고 그 비전을 실현하는 것이 경영이다. 말고삐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서울대 합격을 바라는 것은 목표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가 목적이다.

말고삐를 잡고 고교시절을 보내는 삶을 살고 있는데 대학생의 20%는 고교시절보다 나아지지만 70%는 동일 수준이고 심지어 10%는 고등학교 때보다 더 못하다. 대학시절에 더욱 발전한 학생들을 면담해보면 결과에 큰 차이가 있다. 그들에게 대학 입학은 수단이고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그래서 대학시절에 큰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기업도 동일하다. 대한민국은 중진국 함정에 빠져 있다. 고교시절에는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목표고, 대학은 취업률이라는 목표에 빠져 있다. 방송도 모두 동일하다. 메마르고 고갈되 가는 목표를 추구한다. 목표 위에 목적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고교시절에 어떻게 목표만 추구하고 있나 고민해야 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삶을 오래 하기 힘들다. manner는 manage와 어원이 동일하다. 자기를 지키는 행위를 하는 것이 타인을 위하는 것으로 확장되는 것이 매너다. 매너는 나 자신의 기품과 품위를 높이고 지키는 것이 확장되어 남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다.

목표는 자기를 지키는 행위와 거리가 있고 목적은 자기를 지키는 것이다. 왜 사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언행일치를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할 것인가 일 잘하는 사람을 가까이 둘 것인가. 언행일치가 되느냐는 거리를 두고 확인해야 한다. 목표를 추구하는 자는 일 잘하는 사람을 선호한다.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은 일보다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을 선호한다. 결국은 인격적 선택이 지속적 성장에 기여한다.

윤리적이냐 기능적 일을 잘 하느냐는 간접적이냐 직접적이냐의 차이다. 책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어떤 인간이나 어떤 기업도 자신의 시선 이상으로 절대 살 수가 없다고 했다. 시선의 높이에 따라 절대적으로 제한된다. 초등학교부터 박사과정까지 시선의 높이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처럼 아침 강의에 참석하는 것도 시선의 높이를 확장하려는 것이다.

왜 시선을 높여야 하는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새로운 것을 표현한 것이다. 표현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주인으로 서겠다는 마음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왜 대답을 하지 않는가. 틀릴까봐 그렇다. 하지만 어떤 것도 옳아서 태어난 것은 없다. 스마트폰도 그냥 표현된 것이다. 우리는 옳고 그름에 빠져있다. 아주 낮은 단계다. 표현을 하는 것이 옳은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이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칩이 있다. 반도체칩. 포카칩. 포테이토칩! 옳고 그름에 빠진 삶은 수준 낮은 능력이고 매니지 할 수 없고 좋은 매너를 가질 수 없다. 표현하는 것이 능력이다. 
반도체칩과 포테이토칩의 수준? 반도체 만들기 위한 지식과 이론이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진다. 이 세계는 절대로 평등하지 않다. 상하로 되어 있다. 지적 활동을 한다는 것은 세상을 높낮이로 본다는 것이다. 지식이 높아진다라는 의미는 통제력과 영향력이 커지는 것으로 힘이 세진다는 의미다.

지식은 높낮이가 있다. 학문들 사이에는 높낮이가 있을까? 경제학과 물리학은 어느 것이 높을까? 물리학자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하므로 물리학의 통제력이 크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수학. 철학이 있다. 세상에 원과 점과 선이 있는가. 없다

경기도에서 경기의 의미는 '거의 서울'의 의미한다. 철학의 어떤 내용도 보여줄 수가 없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 인간을 탁월하게 만드는 두 가지 능력은 추상과 은유이다. 

경제 경영학으로 매니지가 안되는 단계가 중진국 함정이다. 인문학과 같은 더 높은 시선이 필요하다. 칼 포퍼의 제자가 조지 소로스다. 왜 선진국은 철학적 시선으로 이끄는가. 앞서갈 수 있는 선도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질문에서 나타난다. 우리 사회를 채우고 있는 모든 문명이 따라 하게 되어있다. 물건과 제도 중에 우리가 만들기 시작해서 가지고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

 다른 나라에서 한 것을 따라해서 여기까지 왔다. 아직까지 우리 문명은 따라 하기를 해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대답하는 습관으로 살아오지 못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선도력을 갖춰야 하고, 선도력을 갖고 싶으면 질문하라. 궁금함을 가지고 표현해야 배울 수 있다. 

누가 더 많이 더빨리 뱉어내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대답에 익숙한 인재가 채운 사회는 미래를 열지 않고 과거에만 사는 것이다. 시시비비에 맞추는 것은 과거다. 옳고그르냐를 집중적으로 따지는 것은 과거를 살기 때문이다. 그대로 배워 요구할 때 그대로 뱉어내는 것이다.

지식과 이론이 머물다가는 중간역으로만 존재한다. 전달하는 매개재로 존재할 뿐 주도적으로 살지 못한다. 주도권은 지식과 이론이 된다. 내 속에 있는 원초적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 자기가 바라는 삶을 살았나? 좋은 것이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위해 살고 있는가?

우리는 대답에 익숙하기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과감함보다는 해야하는 것을 하는 안일함을 선호한다.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기보다 좋은 것을 하는 착실한 삶에 안주한다. 선도력을 가질 수 있는가? 내 안에 있는 긍금증과 호기심이 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질문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유일하게 궁금증과 호기심이 있을 때만 자기 자신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궁금증과 호기심의 결과물이다. 우리 자신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회복해야겠다. 늙어간다는 것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늙은 기업의 특징이 궁금증과 호기심이 없다는 점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을 추구하는 삶은 목표에 매몰되지 않고 목적을 추구한다.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무장한 사람을 독립적 주체라고 한다. 자기의 주인이 자기인 사람들이다. 독립적 주체가 되느냐는 질문이 나와야만 선도력을 가질 수 있다.

경전이 할 말을 모두 한 후에 묻는 말은 '니가 너냐? 너는 누구냐? 너는 네 꿈을 꾸느냐 다른 사람의 꿈을 꾸느냐?'다. 다른 이가 정한 인생을 사느냐 네가 정한 인생을 사느냐.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 누가 뭐래도 나만의 특별함으로 살겠다는 이는 이 질문이 자신을 자주 괴롭혀야 한다. 개인, 기업 및 국가에도 해당된다.

철학을 40년 공부하고 나서 그런 진리는 없다는 생각이다. 99.99%인 진리가 뭐냐? 여러분이나 나나 금방 죽는다는 점이다. 서강대에서 매년 3천 명의 신입생을 채워주는데 부럽지 않다 왜? 모두 금세 죽기 때문이다. 장자가 말하길 인생 천지지간 한 번 사는 게 천리마가 책받침의 틈 사이로 휙 지나가는 것과 같다. 삶은 찰나다.

삼시세끼 프로그램 중 여성 게스트가 식사 후 평상에 누워 별을 보자고 하니 조명도 끄고 별을 보며 감탄한다. 하늘에 걸려 있는 별을 보기 위해 소란스러운 절차까지 밟는 것에 비해 우리 자신에게 있는 별을 보려고는 노력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감동을 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찰나를 사는 인생에서 한 번도 별처럼 사는 삶을 살지 못하고 간다.

빛나는 것이 왜 빛나는지 연구하고 헤집지만 정작 자신은 찰나를 살고 간다. 이렇게 살고 가도 괜찮은가? 타인의 빛나는 결과를 흡수해서 대답하는 삶만을 살다 보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모양으로 둑을 쌓을 것인가. 

거지에게 돈을 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인격에 큰 차이가 있다. 돈을 주므로 나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봉사를 한다는 것은 쪼개서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세계로 만드는 것이다. 봉사나 사회적 공헌은 나를 확장하는 것이다. 저 영역까지 내가 책임지겠다는 의식이다. 시민의식이 성숙된 사람은 영역과 나의 책임성을 확장하고 커간다. 시민은 명령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생산하는 사람이다. 주도권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내 존엄과 자존을 지키며 윤리적 입법자로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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