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의 『한국통사』에 이어서 『왕양명실기』에 도전했다.
이 책은 대한제국의 주권이 '한일병합조약'으로 일본에 넘어간 시점인 1910년에 출간되었다.
박은식은 조선과 대한제국을 거치며 한 나라가 약할 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직접 목격했다.
그래서 이 나라가 양명학을 통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결과가 이 책이다.
책 속에는 수많은 지명과 인명이 나오기에 각 페이지마다 주석도 자세히 달았다.
한자가 많고 익숙하지 않은 지명 속에서 독자는 간혹 길을 잃기 쉽다.
그래서 양명학, 치양지, 양지, 지행합일과 같은 개념을 이해하는 정도를 목표로 읽으면 충분하겠다.
아래는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과 관련된 소감을 짧게 포스팅했다.
경제 · 군사적으로 강한 소수가 약한 다수를 지배하는데, 자유로운 경쟁을 자연도태의 한 형식으로 파악하는 사회진화론은 결국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가장 현실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경향들은 결국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일면적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한다. (15)
다양한 각도에서 역사를 볼 필요를 일깨우는 문장이다.
교육 과정에 맞춰 주어진 정보만으로 역사를 볼 때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다.
사회진화론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 무장한 강대국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이론이다.
과연 인간의 역사가 사회진화론만으로 설명이 되는 것인지, 오류는 없는지 질문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사회진화론의 영향은 강자의 논리를 약자의 귀감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현실 문제를 오로지 집단 내부의 무능력 탓으로만 파악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곧 외세에 의한 현실의 어려움은 우리가 못나서 당한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그래서 일부 인사들은 이후에 친일파가 된다. 반면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자강의 논리를 바로 민족 내부에서 찾았는데, 고대사 연구 · 민족종교 부흥운동 · 학문 개혁 등이 그것이다. (17)
뉴라이트 역사관을 가진 친일 성향의 인물들의 주장이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한다.
식민지근대화론은 그들이 해석하는 우리의 역사다.
다양한 의견이 허용되는 국가이긴 하지만 국가적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역사관을 정립하고 공감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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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한국통사_1864년부터 1911년까지 쇠약해지는 구한말 아픈 역사
그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목격했던 근대사는 쓸 수가 있을 것 같으므로 갑자년(1864년)에서부터 신해년(1911년)까지의 역사를 총 3편 100여 장으로 나누어 서술하여 이를 '통사(痛史)'라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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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양이 강성하게 된 것은 정신과 도덕적인 측면에서 종교개혁으로 가능했고, 일본이 부국강병을 하게 된 것도 양명학으로 가능했다고 인식한다. 따라서 우리가 국력을 배양하여 독립을 이루려면 민지, 즉 과학과 실업을 발전시키고, 정신적 · 도덕적 측면에서 유교를 양명학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 유교개혁의 참뜻이다. (24~25)
다소 아쉽게 느낀 것은 일본 메이지유신의 인사 다수가 양명학파이고, 중국 학자들의 다수도 양명학을 종지(宗旨)로 삼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양명학을 시대를 구할 학문(정신)으로 확신에 차 있다는 점이다. (...)
박은식이 『왕명학실기』를 출간할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본다.
박은식이 『한국통사』에서 조선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어떻게 일본이 조선의 권리를 빼앗아갔는지 설명한다.
박은식은 서양이나 일본이 부국강병으로 강대국이 된 사실을 이해했다.
한 나라가 강성해지기 위해서는 양명학을 바탕으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나라는 일본에 넘어가버린 후였다.
이 양지(良知)는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을 막론하고 차이가 없으니, 천하고금의 인간에게는 동일한 것이구나. (67)
양명학에서는 '양지'를 인간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도덕적 판단과 실천에 있어 근본적인 원리라고 한다.
이 책에서도 반복해서 '양지'라는 말이 언급된다.
한자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철학적인 의미가 부여되다 보니 어렵게 다가온다.
우리나라 유학의 유래를 보면, 가장 유력한 학파가 송나라 유학자의 충실한 노예가 되어 무단(武斷)의 악습을 행사하는데, 학계로 새로운 학설을 내는 자가 있으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죄명으로 내몰아 인간 사상을 속박하고 조그만 자유도 허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인재들이 줄어들고 인간의 지혜가 막혀 고질적인 병폐가 날로 더욱 심해졌다. (71)
우리 조선에서 그런 증거를 대면, 기해예송(己亥禮訟)으로 사림이 서로 싸워 당쟁이 더욱 치열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고, 국정의 부패상이 날로 심했다. (271)
유학이 진화 발전하지 못하고 송나라 유학자 주희의 성리학에 매여 있는 상태를 비판한다.
새로운 이론과 주장이 계속 유입되고 기존 지식과 결합하며 발전해야 하는데 새로운 학설은 사문난적이라며 몰아냈다.
사상의 족쇄가 되었고, 인재의 유입은 중단되어 결국은 조선의 멸망을 초래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뜻은 선생이 자세히 논했다. "가장 옳다고 하는 앎도 행하지 않았다면 앎이 아닐 뿐이다"라는 이 말이 지행합일의 으뜸가는 요점이다. 세상에는 단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만 있지 완전히 무지한 사람은 결코 없다. 그러나 오직 행하지 않으므로 앎이 되지 못할 뿐이다. (96~97)
앎이 절실하고 참되며 독실한 곳이 바로 행동이요, 행동이 밝히 깨닫고 정밀하게 살핀 곳이 바로 앎이다. 앎과 행동에 관한 공부는 본래 서로 떨어질 수 없다. 단시 후세의 학자들이 두 가지 공부로 나누어 앎과 행동의 본체를 잃어버렸다. (276~277)
대체 양명학이 치양지 세 글자를 핵심으로 삼았는데, 양지는 본체이며, '치'(致) 자는 공부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본체가 공부요 공부가 본체라" 하니, 아는 것과 실천하는 일이 한 가지 일이라는 것과 사물에서 연마하는 것이 모두 이 치 자와 관련된 공부이다. 양명학의 진수를 여기서 엿볼 수 있다. (308)
머리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행하지 않으면 아는 게 아니라는 '지행합일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지만 행하지 않기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성리학에서는 지(앎)과 행(행동)이 순차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양명학에서는 앎과 행동은 하나라고 본다.
그래서 행함이 없으면 앎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무종이 유근에게 속았음을 알고 드디어 유근 일족을 없애고, 아울러 그의 무리인 장문면 등을 목 베었으며, 그를 통하여 등용된 관리도 모조리 파직했다. 또 그의 잘못을 간하다가 쫓겨난 자들을 복직시키니, 선생 또한 복권되어 여릉현 지현으로 관직에 올랐다. (100)
왕양명이 명나라 무종 시대에 유근으로 인해 쫓겨났었다.
하지만 유근의 실체가 밝혀지고 왕양명도 복권되어 다시 관직에 올랐다.
당시 무종의 측근에서 누군가가 말하기를, 서역(西域)에 중이 있는데 삼생(三生)의 일을 알아맞히니 그곳 사람들이 그를 살아 있는 부처라 한다고 했다. (113)
명나라 시대에 '서역'은 현재의 신장 위구르 지역이나 중앙아시아, 넓게는 인도까지 아우른다.
선생은 영왕 신호의 변란과 장충 · 허태의 참소를 겪은 이후로, 양지를 드러내고 확충하는 공부인 치양지(致良知)가 참으로 환란을 잊게 하고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더욱 믿게 되었다. (239)
양명학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용어 '양지'와 '치양지'다.
치양지는 양지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이 책에서 왕양명은 단순히 학자가 아닌 군사 전략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선생은 천신만고 끝에 불세출의 공적을 세우고 금의환향했다. 이는 남자로서 유쾌한 일이나 선생은 이것을 뜬구름처럼 공허하게 여기고, 한 터럭만큼의 자만심도 없었다. 그래서 월수 동쪽으로 흰구름 보이는 초가집으로 나아가 안신입명(安身立命)하는 땅으로 여겼다. (245)
평범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이다.
훌륭한 공적을 세우고 돌아올 때면 누구나 뜬구름이 되기 쉽다.
하지만 왕양명은 몸을 천명에 맡기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땅으로 향했다.
내가 매양 훼방하거나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쉽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근심했는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구했지만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놀라 말하기를, "남이 나를 훼방하는 것은 나에게 약이 되니 무엇 때문에 화를 내겠는가" 했다. (260)
그러므로 앎을 이루는 것(致知)은 반드시 행동을 통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행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앎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그러니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본체가 더욱 밝지 않은가? (279)
앞에서 말한 '치양지'와 '치지'는 유사한 말이다.
양명학의 핵심인 지행합일에 대해 다시 정리한다.
게다가 한 인류의 생존경쟁이 오직 지식과 기능의 우열만 주시(注視)하니, 발본색원론이 물정에 어둡고 절실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287)
오늘날 우리 사회는 '지식'과 '기능'의 우열을 강조하며, 능력주의와 각자도생의 분위기가 팽배하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에서도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우리는 불평등의 결과로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면에 태어나면서부터 불평등한 환경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 마음속에 있는 양지는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 사이에 차이가 없고, 예나 지금이나 천하 사람들이 모두 같다. 세상의 군자들이 오직 양지를 발휘 · 확충하는 데 힘쓰면, 옳고 그름을 공정히 분별하고 좋아함과 미워함을 동일하게 취급할 것이다. 그리하여 남을 자기처럼, 나라를 자신의 가정처럼 대할 것이다. 그래서 천지만물을 한 몸으로 삼으니,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찾아도 찾지 못할 것이다. (300)
'양지'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군자와 천하를 다스리는 바탕이 양지가 되어야 할 당위성을 보여준다.
이미 말했지만 붕우들과 함께 학문을 익힐 적에 내가 말한 학문의 종지(宗旨)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곧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은 마음의 본체요,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은 뜻의 움직임이고,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은 양지이며,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은 격물이다'가 그것이다. (318)
양명학에서는 주자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비판한다.
'격물'은 선을 행해서 약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양지'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선과 악을 구분하는 마음이다.
'치양지'를 통해 '격물'하는 것이 학문의 종지라 할 수 있겠다.
우리 동료들의 학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신의 몸을 닦아 남에게 미치게 하여 세상에 보탬이 되고자 함이 아닌가? 오늘날에 이르러 이른바 성현의 학문을 전적으로 폐지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이 학문을 강명(講明)하여 자신의 몸을 닦아 남에게 미치고자 하는 요령으로 삼고자 한다면, 오로지 왕학(王學)의 간단하고 쉬우며 진실하고 절실함이 시의적절할 것이다. (346)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당신이 학문(혹은 일)을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세상이나 사회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도록 좋은 영향을 미쳐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 주변 지인만을 위해 살아가기에는 우리의 존재는 훨씬 소중하지 않은가.
적절한 경쟁이 무력하고 정체된 사회에 약이 안 되는 것은 아니로되, 이렇듯 경쟁의 지나친 강조는 부도덕한 수단을 용인할뿐더러 경쟁에서 밀린 대다수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들고, 지배층의 부도덕한 기득권을 공정 경쟁에 대한 승리로 착각하게 만들며, 사회적 비판의식을 마비시켜 버린다. (444)
마이클 샌델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문장이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 중에 부도덕한 사람들은 현재의 룰이 공정하다고 착각한다.
그러면서 능력주의를 강조하고 공정한 경쟁을 강조한다.
원천적으로 뒤에서 출발해야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절망케 한다.
반드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제시돼야 한다.
이 책을 쓴 박은식은 학자 · 사상가 · 개화운동가 · 언론인 ·교육가 · 독립운동가 · 정치가였으며, 여기에 등장하는 왕양명 또한 그의 생애가 말해주듯 군사 전략가 · 지휘관 · 관리 · 문학가 · 교육가 · 사상가이다. 주인공이나 저자가 다사다난한 현실 속에서 전인적 인격과 고매한 성품을 갖추고 살았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445)
박은식과 왕양명이 지식, 인격, 성품 여러 측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의견이다.
독서습관1063_왕양명실기_박은식_2010_한길사(260608)
■ 저자: 박은식
박은식은 황해도 출생으로 어려서 부친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청년기에는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정통 주자학을 공부하였다. 한때 정약용의 문인들과 접촉하면서 다산의 실학사상을 섭렵했다. 그때까지는 주자학자로서 명망을 쌓아갔다.
그러다가 1898년 독립협회의 민권 · 자주 · 자강운동이 본격화되던 때에 애국계몽운동가로 변신한다.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고, 『황성신문』이 창간되자 장지연과 함께 주필로 활동한다. 잠시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교육활동에 종사하였고, 또 서우학회를 발기하고 서북학회의 회장직을 맡았으며, 그 기관지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애국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가 창립되자 적극 참여하였다.
이러한 교육 · 학회 · 언론활동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 유행하던 서양의 사회진화론과 계몽주의사상, 그리고 과학사상의 영향으로 형성된 민족자강론에 바탕을 둔 애국계몽운동이었다. 특히 우리가 서양처럼 발전하려면 그들의 종교개혁처럼 우리도 주자학을 양명학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왕양명실기』를 저술하였다. 그것은 유교의 동력을 국권회복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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