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캠벨의 <영웅의 여정> 1부에 이어 2부를 포스팅합니다.
책에서 인용하고 싶은 문장들을 중심으로 네 가지 주제로 분류해서 정리했습니다.
https://bandiburi-life.tistory.com/2453
신화는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가장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신화를 통해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습니다. 조지프 캠벨의 신화론은 우리에게 신화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합니다.
1. 모든 이야기의 시작, 신화의 본질
신화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영웅들의 모험담은 우리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고, 북유럽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동양의 불교 신화는 고통과 깨달음에 대한 진리를 담고 있고, 아프리카 부족들의 신화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강조합니다.
<피네간의 경야>이건, 아니면 나바호족 관련 자료이건, 아니면 힌두교 관련 자료이건, 아니면 하인리히 침머의 유고이건 간에, 모두 똑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신화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제게 말해 줄 수는 없었지요. 그러니까 여러 문화와 문화마다 각각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환경과 필요의 견지에서, 그리고 특히 국지적 윤리 체계의 견지에서 굴절되기는 했습니다만, 그 모두는 '하나의 신화'였던 겁니다. (286~287)
인간 정신의 주된 각성은 공감에 있으며, 선동의 주된 기능은 바로 그런 공감을 억압해서 쓰러트리는 것입니다. (474)
신화는 느낌과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사고로부터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이데올로기와 신호의 차이란 곧 자아와 자기의 차이입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사고 체계에서 나오는 것인 반면, 신화는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484)
물론 이 이야기에는 교훈이 있습니다. 즉 우리 모두가 마치 염소처럼 살아가는 호랑이라는 것입니다. 사회학의 기능은, 그리고 우리의 종교 교육 대부분의 기능은 우리에게 염소처럼 되라고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반면 신화적 상징의 적절한 해석과 명상의 훈련은 우리 자신이 호랑이 얼굴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492)
2. 신화와 종교, 어떤 관계일까?
많은 종교들이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신화와 종교는 엄연히 다릅니다. 신화는 상징과 은유를 통해 진리를 표현하지만, 종교는 신화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교리를 만들어냅니다. 조지프 캠벨은 종교가 신화의 본질을 왜곡하고,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억압한다고 비판했습니다.
(...) "우리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고 믿습니다." 여기서의 '우리'는 결국 특정 집단을 의미했고, '하느님'도 특정 집단의 신을 의미했습니다. 그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디 있었던 걸까요? 일신론 공동체에서 신화를 다룰 때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신화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저 사실이라는 겁니다. 이런 식의 해석은 상징을 구체화한 것이며, 그리하여 그 상징의 메시지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메시지를 잃어버린 겁니다. 그들은 상징밖에는 갖지 못한 셈입니다. (307)
가톨릭은 모든 묵상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다른 어딘가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결국 내게도 일어나야 마땅한 뭔가의 은유로서 (즉, 나 역시 죽었다가 부활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 내 자아는 죽고 내 신성을 부활해야 한다고) 읽지 못하는 한, 그 내용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312)
중국과 일본에서 말하는 관음觀音이라는 끝없는 동정심을 지닌 위대한 보살은 순수히 신화적 인물이면서도 뭔가를 상징합니다. 반면 기독교 전통에서는 용어나 이미지의 역사적 이해를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기독교인 앞에서 대뜸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물리적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고, 또한 하늘로 올라간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고 치면, 그거야말로 그 사람이 자기 신앙에서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뭔가에 대한 도전일 것입니다. 유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341)
예를 들어 유대교에서는 하느님이 이름을 갖고 있으며, 또한 무엇이 선하고 옳은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런 것들은 불의 언어이며, 신화를 윤리학으로 감소시킵니다. 거기에는 숭배의 순간이, 제가 하는 말로는 예배의 순간이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마치 경전에서 거론된 뭔가에 상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신비주의는 사실 나와 너라는 이러한 분리의 모든 장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이 "나는 그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 신은 졸지에 장애물이 되고 맙니다. (355~356)
신화를 은유 대신 사실로서 읽는 순간에 우리는 투명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신화는 탈선이 되고, 미혹시키는 안내자가 되고 맙니다. (367)
예수는 십자가에 달렸으며, 이 십자가야말로 동산의 두 번째 나무였으며, '불멸하는 생명의 나무', 즉 '보리수菩提樹' 아래 앉은 붓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보리'는 '자기가 알려고 추구하던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자각한 자'란 뜻입니다. 즉 영원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 두 종교의 차이가 흥미로운 까닭은, 기독교에서 우리는 예수와 하나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즉 그는 우리의 모범이므로 우리는 그를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토마스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을 마시는 사람은 나처럼 될 것이고, 나는 그가 될 것이다." (376)
유대교-기독교 전통에서 신화의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온통 역사적인 것뿐이니까요. 사실인 내용뿐이지요. 이것 때문에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떨어지기를 원하고, 우리의 의례가 사회 참여와 관련이 있도록 만들기를 원하는 겁니다. 유대교 전통은, 그리고 기독교 전통 중에서 상당 부분은 우리를 사회로 이끌어 갑니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속에서 하나라는 겁니다. (416)
우리 서양의 전통에는 타락이라는 것이 있고, 자연은 좋지 못하므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며, 선을 위해서 악에 대항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하신 하느님이 왜 이런 종류의 세계를 만들었을까요? 참 이상한 질문이지요! (417~418)
이제 모세는 머리에 돋아난 빛의 뿔을 가지고, 또한 이 작은 메시지를 가지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는 실제로 그 메시지를 반드시 강제해야 했습니다. 그런 일도 때때로 일어납니다. 이른바 엘리트적이고 특별한 교리라고 부를 만한 것을 가져와서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유럽으로 전래되는 과정이 딱 그러했습니다. (445~446)
첫째로 우리를 특정 사회와 연결해 주고, 이 사회는 또 다른 사회와 다르다고 지적해 주는 데에 가장 큰 관심을 두는 종류가 있습니다. 이 범주에서 가장 강력한 책은 기독교의 성서입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민족과 다른 민족을 구별하게 하고, 이는 다른 민족에게 못되게 굴 수 있는 특권과 기타 등등의 특권을 제공합니다. (476)
3. 현대 사회에서 신화의 의미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신화는 더 이상 종교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영화, 소설, 게임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신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화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또한,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결국 이 세상 사람의 절반은 각자의 은유가 사실이라고 믿는 종교적인 사람들인 셈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유신론자라고 부릅니다. 나머지 절반은 은유가 사실이 아니므로 거짓이라고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신론자입니다. (305)
단테는 1321년에 사망했는데, 이런 종류의 카드에 관해서 우리가 가진 최초의 역사적 증거 가운데 또 하나가 바로 그 시기에 나온 한 설교에 들어 있습니다. 그 카드에 반대하는 내용의 설교였는데, 이쯤 되면 우리는 궁금해지게 됩니다. '왜 굳이 카드에 반대했을까?' 그 카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거기에는 무신론 철학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정통파 기독교에는 세계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세계의 종말이란 신화적 상징을 역사적 사건의 견지에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 신화적 상징은 영적 사건에 관해서 이야기할 뿐입니다. 즉 세계의 종말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영적 사건인 것입니다. (327~328)
음, 이런, 세상에, 우리는 오전에 <스타워즈>를 봤고, 오후에 <제국의 역습>을 봤으며, 저녁에 <제다이의 귀환>을 봤습니다. 솔직히 저는 정말로...... '짜릿' 했습니다. 은유를 이해하는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396)
지금 우리를 조종하는 것은 바로 경제학입니다. 경제학과 정치학이야말로 오늘날의 삶을 지배하는 힘들이며, 만사가 비뚤어진 이유도 바로 그래서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자연과의 합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이런 신화들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 신화는 자연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며, 사회를 자연과 합치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368)
우리 서양의 전통에는 타락이라는 것이 있고, 자연은 좋지 못하므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며, 선을 위해서 악에 대항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하신 하느님이 왜 이런 종류의 세계를 만들었을까요? 참 이상한 질문이지요! (417~418)
우리의 역할이 사회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신화적 근거를 지닌 삶이 우리에게 가능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 존재의 위엄이 뭔가를 상징하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개인이 깨닫는다고 치면, 개인주의도 완전히 좋습니다. (435~436)
우리는 반드시 자연과 관계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성서에서 명령하는 것처럼 자연을 정복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우리는 자연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439)
4. 나만의 신화를 찾아 떠나는 여정
조지프 캠벨은 우리 모두가 내면에 신화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신화는 단순히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의 경험과 감정을 담고 있는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을 신화처럼 이야기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는 '읽어야' 합니다. 아니면 그 뭔가와 접촉하기 위해서 다른 매체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나에게 말을 거는 뭔가를 혼자 힘으로 발견할 수 있고, 바로 그것이 나를 흥분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를 흥분시키지 않는다면, 음, 꽝입니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닌 겁니다. (404)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러 처음 갔을 때에만 해도 새러 로렌스에서는 학생들이 원하고 또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일이며, 그 요구에 맞추는 정보를 제공하려 노력하는 일에서 크나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교수진 가운데 무려 50퍼센트 이상이 제가 생각하는 바의 교육, 즉 끌어내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주입하고만' 있었습니다. (437)
독서습관 915_영웅의 여정_조지프 캠벨_2020_갈라파고스(240726)
■ 조지프 캠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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