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그런 근대화의 과정이 바로 '남'이 아닌 '나', '우리'가 아닌 '나'의 탓이라는 자각으로 인해 더 이상 그 어떤 합리화도 불가능하고, 희생양의 논리 또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근대를 만든 것도 인간이고, 그렇다면 그것을 책임져야 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의식이 김승옥 소설의 '자기 세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김승옥만큼 자아의 비극에 천착하는 작가도 드물다. 김승옥은 자아의 파괴를 통해 자아의 발전을 도모하는 지적인 작가이고, 이분법적 시각이 아닌 이중적 시각에서 자아의 양면성에 주목하는 입체적 작가이다. 근대에 대한 유혹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는 진정한 근대인으로서 혹독한 대가를 제대로 치르려 하기 대문이다. - 김미현 문학평론가의 김승옥 론 中(400페이지)
큰아들이 도서관에서 대출한 <무진기행>이 거실에 놓여 있다.
'무진'이란 곳이 익숙하다 싶어 구글링 하니 소설 <도가니>에서도 등장한 가상의 지명이라고 한다.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 저자 김승옥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 <무진기행> 속에는 김승옥의 단편, 중편소설이 여러 개 담겨 있다. 시대적 배경은 1960년대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20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지 10년이 조금 넘은 시기다. 2022년 현재를 사는 우리가 1997년 IMF 경제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기억하는 정도로 해방과 전쟁의 흔적이 사회 곳곳에 남아있던 시대다.
김승옥의 소설에 대해 책의 말미에 김미현 평론가가 설명한 내용을 보고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사실 설명도 쉽지 않다) 현대 소설가들의 소설처럼 이해하기 쉽고 이야기 속으로 쏙 빠져드는 재미는 없다. 단락의 구분이 길어 답답한 느낌마저 든다. 여러 이야기가 겹쳐지기도 한다.
1960년대의 국민 대부분이 가난하고 부패가 만연한 시기라는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특히 4.19 혁명과 5.16 쿠데타가 있었고, 미국의 요구에 의해 베트남 전쟁에 젊은이들이 파병되는 때였다. 한국전쟁이 얼마 전에 있었기에 언제 전쟁이 다시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감도 남아 있었다.
1970년대 시골의 초가집과 호롱불과 같은 가난한 삶의 흔적을 조금은 경험했던 내게 1960년대의 환경은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 그래도 김승옥의 소설은 서사 중심이기보다는 심리 중심이라 따라가려면 집중이 필요하다.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어둡다. 특징이라면 여성과 섹스, 여성의 성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급여나 상품에 대한 화폐단위를 보며 인플레이션을 생각한다.
만화가로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설사 난 어른을 보며 사람은 많고 일자리는 한정된 실업의 시대를 상상해본다.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하는 삶과 아이부터 어른까지 정해진 일과에 따라야 하는 부유한 집안 분위기를 보며 빈부격차를 떠올린다. 은행원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미혼이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부부지만 남편을 남편이라 부르지 못하는 성차별을 본다. 남성들의 대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는 유교적 가부장적 사회 이면의 진실을 말해준다.
<무진기행>을 통해 1960년대의 대한민국 수도에서 민초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당시에 비해 우리는 어느 나라 못지않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심리적 행복감은 각자도생의 심리적 압박감과 부와 명예에 대한 비교 행위로 퇴색되고 있지 않다 우려된다. 미래에 대한 과도한 걱정으로 현재의 행복을 날려버리지 말아야겠다.
독서습관 645_무진기행_김승옥_2019_민음사(221024)
■ 저자: 김승옥 (1941~)
1941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1945년에 귀국하여 전라남도 순천에서 성장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해에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해 4.19 세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생명연습>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김치수, 김현, 염무웅, 서정인, 최하림 등과 동인지 <산문시대>를 발간했고, 여기에 <건>, <환상수첩>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역사>, <무진기행>, <차나 한 잔> 등의 단편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1965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서울 1964년 겨울>로 제10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참신한 글쓰기로 '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 작가'로 평가받았다.
1967년 김동인의 <감자>를 영화화하며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소설 창작보다 시나리오 작업에 열중했는데, 이로 인해 '한국의 장 콕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68년 이어령의 <장군의 수염>을 각색하여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했고, <영자의 전성시대>, <내일은 진실> 등 다수의 작품을 각색했다. 1977년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서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80년 <동아일보>에 <먼지의 방>을 연재하던 중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인해 집필 의욕을 상실해 연재를 스스로 중단했고 1981년 종교적 계시를 받는 극적인 체험을 한 후 신앙생활에 몰두하면서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았다.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2004년 투병 끝에 그동안의 신앙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을 발표하면서 조금씩 문학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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