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G 크리슈나무르티란 인물에 대해 처음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불교와 기독교, 천주교 등에 속한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가나 명상을 통해 마음을 수련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을 상업적으로 돈벌이에 이용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깨달음과 행복을 찾아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크리슈나무르티의 책 <그런 깨달음은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영적인 스승, 구루, 유명한 종교인들에 대해 이기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들의 말을 들을 때는 명확해지는 듯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에 변화는 없습니다.
저자가 49세에 변화를 경험하고 자신의 경험담과 인터뷰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소중한 존재인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합니다.
거창한 종교적, 영적 깨달음을 찾아나서기 보다 우리 내면을 보게 합니다.
아래는 책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글을 인용합니다.
우리 외부에는 어떤 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두려움에 몰려서 신 God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이 아니라 두려움fear입니다. (14)
여러분이 자연스러운 상태에 들어서도 개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결국 프로그램된 대로 작용하는 컴퓨터 같은 존재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스스로를 바꾸려고 애쓰는 짓은 여러분을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합니다. 개성은 예전 그대로 남아 있을 겁니다. (106)
에머슨은 아주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만일 당신의 이웃이 신을 믿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신이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그 이웃이 잘 보게끔 해주라고. 사랑의 신, 진리의 신, 혹은 이런저런 신에 관해서 얘기하는 것은 전혀 쓸데없는 짓입니다. (131)
삶은 하나입니다. 삶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잘못 가고 있는 겁니다. 서구인들은 교회에 가는 일요일에만 경건하게 행동하고 나머지 날들에는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139~140)
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주를 줍니다. 그것의 진짜 의미는 뭘까요? 교회 사람들은 야만인 시절에서 그런 관행을 베껴온 겁니다. 영웅이 죽었을 때 야만인들은 그의 위대한 능력들을 얻고 싶은 마음에서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셨으며 그런 관행은 대대로 전해 내려왔죠. (141)
이 나라(인도)에서 국회의원이 많은 돈을 쓰고 당선 되고 나면 어떻게 해서든 돈을 긁어모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나라에 봉사를 하려고 국회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을 나무라지 마세요. (142)
문화라는 게 없었더라면 자연은 훨씬 더 많은 꽃을 피워냈을 겁니다.
그러므로 문화는 인류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데 장애물이 된 겁니다.
개인이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158)
사람들은 그 꽃의 향기를 알아차리지 못하며, 알 방법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길 좋아합니다. "이 꽃은 저 꽃 같은 냄새가 나는군. 이 꽃은 저 꽃 같이 생겼어." 사람들이 하는 짓은 그게 전부입니다.
당신이 그런 짓을 그치고 이 꽃이 무슨 꽃일까, 생전 처음 맡아본 이 향기가 어떤 향기일까 이해하려고 애쓸 때, 저 꽃이 아니고 당신이 찬탄해마지 않는 장미도 아니고 수선화도 아닌, 또 다른 꽃이 존재하게 됩니다. (167~168)
죽음에 관한 모든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당신 같은 젊은이들의 경우에는 특히나 더 그래요. 당신은 삶을 살지도 않고 있어요.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합니까? 왜 그런 데 관심을 갖고 있죠? 살아 있는 사람은 그런 질문을 할 틈이 없습니다.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만이 "내가 죽은 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라는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살고 있지 않아요. 우선 당신의 삶을 사세요. (179)
그 물음은 타버립니다. 그 물음은 생각에서 나오고, 따라서 그것이 타버릴 때는 에너지가 존재합니다. 연소 작용이 일어나죠. 생각이 타버리려면 물리적인 에너지를 제공해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물음이 탈 때는 물음과 아울러 묻는 자로 사라집니다. 물음과 묻는 자는 서로 다른 게 아닙니다. (188)
문화는 개성이 스스로를 자기답게 표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문화는 다른 구상들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생각의 분열증적 움직임을 조장해냈습니다. (196)
사람들은 우리 앞에 완벽한 인간상을 세워 놓았고, 그런 이상이 모든 것을 잘못된 길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완전한 인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는 '변화'가 일어난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아주 특이하거나 괴팍하거나 어리석거나 엉터리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208)
승화 같은 건 없습니다. 그 따위 얘기들은 죄다 헛소리입니다. 성자들은 곧잘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 건 허튼소리요 쓰레기 같은 소리니 믿지 마세요. (212)
우리의 모든 취향은 밖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좋은 것과 싫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적인 도덕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내가 말하는 '도덕morality'은 행위의 전과 후를 문제 삼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회적인 것입니다. 좋은 사람은 어떤 점에서 좋다는 것일까요? 사회에 좋다는 뜻이겠죠.(225)
우리는 욕망 없는 경지를 닦아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삼사십 년 동안 욕망을 없애는 수행을 해도 욕망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뭔가가 잘못된 겁니다. 욕망에는 아무 잘못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욕망 없음(무욕)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에게 있는 게 분명합니다. (228)
성자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려고 애쓰며, 따라서 그는 늘 이원성의 장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반면에 현자는 분리되지 않은 의식 상태 속에서 존재합니다. 현자는 자기가 자유롭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그는 남들을 해방시켜 줘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냥 존재할 뿐이고 그 상태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조용히 사라집니다. (245)
당신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은 나도 갖고 있지 않아요. 당신들이 비참하고 불행한 신세가 되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환상의 종말은 곧 '나'의 종말입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환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251)
여러분이 떠받드는 온갖 도덕과 수행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이 도덕이나 사다나에 관해 입도 뻥긋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 반면 성자들은 모방하는 자들이요 남들에게서 주워 들어 아는 사람들이기에 도덕과 수행을 강조했습니다. (255)
깨달음으로의 여행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런 여행길로 여러분을 인도해주는 척 하는 사람들이나 그런 여행을 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 모두가 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겁니다. (290)
여러분 각자는 유일무이한 존재들입니다.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도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남의 말을 듣고 싶어 하고 이해하고 싶어 하고 다른 누구처럼 되고 싶어 하는 식으로 바라는 것은 사회가 완벽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300)
여러분의 외부에는 어떤 힘도 없습니다.
이 우주에 어떤 힘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에게 있습니다. (304)
당신의 체험을 가능케 해주는 사고구조는 죽은 것입니다. 생명은 살아 있는 것이고 사고구조는사고 구조는 죽은 것이기에 사고 구조는 생명을 절대로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들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저절로 드러나야만 합니다. 생명은 누구도 당신에게 가르쳐줄 수 없는 것입니다. 남한테서 그것을 얻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갖추고 있으니까요. (305)
구루들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최악의 이기주의자들입니다. 모든 구루들은 추종자들에게 하찮은 경험을 제공해주는 싸구려 복지단체나 다름없는 이들입니다. 구루 놀이는 꽤 짭짤한 수익이 생기는 장사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일 년에 2백만 달러를 벌어보려고 해 보세요, 잘 되는가. 자기 재산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크리슈나무르티조차도 8천만 달러를 보유한 제국의 총수랍니다. (311~312)
여러분이 불행해지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아다니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깨달음 같은 것도 역시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수천 년에 걸쳐서 많은 스승과 성자와 구원자들이 나타나 깨달음이란 게 있으며 자기네가 바로 깨달은 사람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한 몫에 몰아서 강물에 집어던져버리세요! 나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깨달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314)
한문으로 된 불교경전 내용이 한없이 심오하고 난해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의 대부분은 소리글자로 된 인도 현자들의 가르침이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뜻글자인 한문으로 옮겨지고, 그것이 다시 소리글자인 우리말로 옮겨지면서 삼중의 왜곡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심오하긴 할지 몰라도 난해할 것까지는 없는 내용들이 이러한 역사적 전달 회로에서의 이중 삼중의 왜곡 때문에 까닭 없이 추상적이고 어려운 것이 된 것이죠. UG의 얘기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소리글자인 영어를 뜻글자라는 중간 회로를 거치지 않고 역시 소리글자인 한글로 직접 옮긴 것이니까요. (336)
독서습관 554_그런 깨달음은 없다_U.G 크리슈나무르티_2019_김영사(220410)
■ 저자: U.G. 크리슈나무르티 Uppaluri Gopala Krishnamurti(1918~2007)
'세계의 스승'으로 지목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영적인 스승이 될 사람으로 선택되어 양육되었다. 지두와도 7년을 교류하는 등 진지하게 '깨달음'을 추구하였다.
49세 때 스위스의 어느 벤치에서 스스로 '재난'이라 부른 어떤 것과 맞닥뜨린다. 이후, 생각의 연속성에 대한 환상과 자기라는 중심체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일련의 신체적 변화를 경험한다. '나'라는 자아의 연속성이 사라진 이 상태를 '자연스러운 상태'라 부르면서 종교적이고 관념화된 '깨달음'과 구분하였다.
라마나 마하리쉬,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등 깨달았다고 알려진 영적인 인물들을 만났고, 깨달음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 다양한 초능력과 신비체험을 두루 거쳤지만, 그 체험들을 특별하고 거룩한 것으로 꾸며 '영적인 사업'을 하기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솔직하게 현실을 직시하여 착각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하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형식과 전통을 거부하며, 특히 깨달음과 깨달은 스승(구루)을 우상화하고 신비화하는 것을 조롱하면서 강렬한 독설을 쏟아내어 '안티 구루'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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