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며 한국전쟁 중에 서울에서 이념 차이로 인해 얼마나 비참한 일이 있었는지 이해했다. 그녀의 소설은 시대를 알게 하며 늘 포근하면서도 풍성하다.
유튜브 '알릴레오 북'에서 <엄마의 말뚝>이 소개되어 빌려 읽었다. 소설을 통해 글 속에 담긴 작가의 생각과 문체를 느끼게 되는데 박완서의 언어는 향토적이고 옆에서 수다를 떠는 듯하다. 이번에도 저자와 이야기 속 여행을 하는 호사를 누렸다.
소설이 거리(材料)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 속에, 버림받은 쓰레기 속에, 외면당한 남루 속에, 감추어진 추악한 것 속에서 소설 거리는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오다가다 우연히 얻어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삶에 대한 꾸준한 통찰력, 따뜻한 연민, 때로는 열정적인 애정에 의해서만 그것을 볼 수가 있고 주워 올릴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주워 올린 다음입니다.
어떤 거리를 소설로 만들기 위해선 주워 올릴 때와는 딴판으로 일단 뜨악하게 밀어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정이 앞서지 않는 냉혹한 마음으로 추리고 다듬고 구성해야 합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작가의 그런 이중성이 철저히 지켜졌을 때만 비로소 명색이 소설이라 부를 만한 것이 만들어졌지 않았나 싶습니다. (9)
엄마는 또 내 귓가에 소근소근 내가 서울 가서 앞으로 되어야 하는 신여성에 대해 얘기해주기도 했다.
"신여성이 뭔데?"
"신여성은 서울만 산다고 되는 게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해야 되는 거란다. 신여성이 되면 머리도 엄마처럼 이렇게 쪽을 찌는 대신 히사시까미로 빗어야 하고, 옷도 종아리가 나오는 까만 통치마를 입고 뾰족구두 신고 한도바꾸 들고 다닌단다."(33)
억척스러운 엄마의 손에 이끌려 서울에서 살게 된 소녀시절의 내가 주인공이다. 지방에서의 삶과는 전혀 다른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에서 세 들어 살아야만 하는 더욱 가난한 환경이다. 엄마는 그곳에 말뚝을 박았다.
한국전쟁 전후의 서민들의 삶을 작가가 체험을 바탕으로 그려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환경이다. 산꼭대기까지 수도가 없어 물지게를 지고 물을 옮겨야 하고, 땔감을 사서 불을 피워 요리해야 하는 시대다. 모든 게 육체적인 노동을 통해 해결된다. 물을 날라주는 것도 돈이고, 땔감을 만들고 배달하는 것도 돈이다. 좁은 집에 대가족이 함께 살고, 빈대로 잠을 설친다.
집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멀리 가지 말라는 주의 빼고는 모두 안집하고 어떻게 지내야 한다는 셋방살이의 법도에 관해서였다. (40)
이사 간 날, 첫날 밤 세 식구가 나란히 누운 자리에서 엄마는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다.
"기어코 서울에도 말뚝을 박았구나. 비록 문밖이긴 하지만..."(66)
소설을 읽는 즐거움은 이야기 자체도 있지만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로의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를 살았던 작가들의 경험과 상상력이 뒤섞인 서사를 따라가는 즐거움이 있다.
'엄마의 말뚝'은 총 3장으로 이뤄져 있다.
1편은 소녀가 서울로 가서 경험하는 이질감과 적응하는 과정으로 현저동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가 흥미롭다. 엄마는 걸핏하면 상것들 하며 주변 사람들을 낮게 본다. 그리고 신여성이 돼야 한다며 강조하는데 소녀는 화려한 빛깔의 옷을 입고 싶다.
2편은 소녀는 가정을 이뤘고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가 넘어져 다리뼈를 크게 다쳐 수술하고 회복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엄마의 마음속에 한국전쟁 중에 서울에서 피난 가지 않고 남아 있다 총상으로 죽은 아들의 억울함이 한이 되어 남아 있다. 저자의 가족사이면서 한반도에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벌어진 민족의 어두운 역사다.
3편은 수술후 골절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엄마는 돌아가신다. 절룩거리면서도 고집스럽게 스스로 화장실을 가기 위해 열심히 운동도 한다. 하지만 86세의 노인에게 버거운 삶이다. 어느 날 변의도 통제할 수 없고 의식도 가물가물해진다. 오빠의 자식들과 함께 엄마를 돌본다. 화장해 고향이 보이는 바다에 뿌리라는 엄마의 뜻과 달리 장지를 찾아다니다 근교에 한 곳을 찾았다. 그리고 엄마는 숨을 거두고 장지에 꽂힌 엄마의 이름이 적힌 말뚝을 나는 새롭게 본다.
이렇게 사먹는 물이니 겨우 식수나 하는 정도였다. 엄마는 비가 올 때마다 내 집으로 떨어진 빗물을 한 방울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독독이, 그릇그릇 받아놓고, 빨래도 하고, 세숫물로도 쓰게 했다. 세숫물에 장구벌레가 가득 들어 있어서 질겁을 하면 엄마는 체에다 받쳐서라도 그 물을 쓰게 했고 쓰고 나서는 한 방울도 버리진 못하게 했다. (69)
박완서 작가의 삶이 온전히 녹아 있는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에서처럼 과거를 살던 세대가 가고 현재를 사는 세대, 그리고 미래를 살아갈 세대가 온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세대의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한 자녀를 둔 가정도 많고 자녀가 없는 딩크족도 늘고 있어 앞으로 다가올 가정이란 어떤 것일까. 자녀들이 서로 왕래하며 경조사를 챙기던 시대가 생계로 바쁘다는 핑계로 직장과 집을 중심으로 동선이 정해지며 점차 경조사도 희미해진다. 요즘은 코로나로 더더욱 인간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다.
나는 오래간만에 실로 오래간만에 나의 어린 시절의 통학로였던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에겐 통학로였지만 어머니에겐 문안과 문밖을 가로막는 성벽도 되었던 등성이는 지금 도시 한가운데의 작은 녹지일 뿐이다.(80)
그때 우리 식구의 사고나 행동은 오로지 빨갱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 노도처럼 남으로 밀리는 피난행렬에 끼었으면서도 검문은 피하느라 도심을 몇 바퀴 배회한 데 지나지 않았고, 오빠는 검문이 있을 만한 곳을 더듬이처럼 예민한 감촉으로 예감하고 재빠르게 피하는 능력 빼고는 아무런 생각도 의지도 없는 폐인처럼 돼 있었다. 나는 이런 오빠는 짐스러운 나머지 혼자 도망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다. "얘들아, 우리 현저동으로 가자꾸나. "(138)
소설과 같이 3대가 서로 친밀한 관계를 갖고 살아가는 모습이 희귀해진 때에 우리는 어떤 세상을 준비해야 할까 고민이 된다. 한국전쟁을 성인으로 살아야 했던 세대의 경험이 증발하고 있다. 60, 70년대 치열했던 시기에 젊음을 불살랐던 세대도 지고 있다. 80년대와 90년대를 살았던 세대는 은퇴하고 있다. 나와 같이 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한 세대는 그 당시 태어난 세대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는 것을 보며 나의 위치도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음을 실감한다.
<엄마의 말뚝>에 나온 듬직한 오빠가 정신이 황폐해지고 몰골이 초췌해져 죽어가는 모습이 가장 안타깝고 슬픈 장면이다. 왜 그랬어야 했는가란 질문이 절로 나온다.
엄마는 나더러 그때 그 자리에서 또 그 짓을 하란다. 이젠 자기가 몸소 그 먼지와 바람이 될 테니 나더러 그 짓을 하란다. 그 후 30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그 괴물을 무화시키는 길은 정녕 그짓밖에 없는가? (148)
나는 조카들과 의논해서 어머니를 번갈아 모시기로 했다. 조카들 또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인 눈치였다. (150)
삼우날 다시 찾은 산소에서 나는 어머니의 성함이 한 개의 말뚝이 되어 꽂혀 있는 걸 보았다. 정식 비석은 달포쯤 있어야 된다고 했다. 말뚝에 적힌 한자로 된 어머니의 성함에 나는 빨려들듯이 이끌렸다. (173)
독서습관499_작가의 자전적 소설속의 삶과 죽음_엄마의 말뚝_박완서_2021_세계사(211220)
■ 저자 : 박완서
1931년 경기도 개풍군(현 황해북도)에서 태어났다. 교육열이 강한 어머니 손에 이끌려 서울로 와, 숙명여고를 거쳐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6.25의 발발로 학교를 그만두고 미 8군 PX 초상화부에서 근무했다. 1953년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고, 마흔이 되던 1970년, 전쟁의 상흔과 PX에서 만난 화가 박수근과의 교감을 토대로 쓴 <나목>이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2011년 1월, 담낭암으로 타계하기까지 쉼 없이 작품 활동을 하며 40여 년간 80여 편의 단편과 15편의 장편소설을 포함, 동화, 산문집, 콩트집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남겼다.
박완서는 삶의 곡절에서 겪은 아픔과 상처를 반드시 글로 쓰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고통의 시기를 살아냈다. "이것을 기억했다가 언젠가는 글로 쓰리라.." 숙부와 오빠 등 많은 가족이 희생당했으며 납치와 학살, 폭격 등 죽음이 너무나도 흔한 시절이었다. 이름 없이 죽어간 가족들을 개별적으로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 처음 글을 쓴 목표였다. 그러나 막상 글을 통해 나온 건 분노가 아닌 사랑이었다. 그는 글로서 자신을 치유해나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만 갇혀 있지 않고 당대의 전반적 문제, 가부장제와 여권운동의 대립, 중산층의 허위의식 등을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려 직간접적으로 의식을 환기시켰다. 그러면서도 문학에 대한 열정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은 보기 드문 문인이었다. "죽을 때까지 현역 작가로 남는다면 행복할 것"이라는 말대로 그는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박완서는 '소박하고, 진실하고, 단순해서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했다. 그의 글은 그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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