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블랜더 거실
독서습관

[498]스스로 말하게 하라_70년 80년대 노동자 철거민 등 민중교육론에 관한 성찰

by bandiburi 2021. 12. 19.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제목만 봐서는 자녀교육에 대한 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1980년대 초반에 고 허병섭 목사가 쓴 글을 모아놓은 민중교육에 대한 깊이 있는 논문들이다. 대학교 시절 마지막 학생운동이 산발적으로 있을 때 대자보 등에서 들었던 '민중'이란 단어의 의미를 책을 통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책날개에 있는 저자에 대한 소개 부분에서 저자가 목사로서 빈민들과 함께 실천하는 삶을 살았고 후반에는 목사직을 내려놓고 무주에서 생태운동을 했다. 하지만 말년에 부부가 일주일 정도의 차이고 뇌병증을 앓았다고 해서 인터넷에서 조회를 해보니 3년 정도 후에 남편인 저자가 별세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넝마주이와 함께 하고, 건설노동자로도 살고, 농부로서 살면서 저자의 삶의 에너지를 모두 발산하고 육체적인 불편함까지 체험하고 가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중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하나하나 소감을 쓰기보다는 아래에 남기고 싶은 글과 시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다만 책을 읽으며 1960년대와 70년대에 국가와 국민의 비대칭적 권력관계 속에서 대다수의 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판자촌 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재개발이라는 명분으로 국가가 강제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는 모습,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공기관 등 누군가는 개발이익을 취했다는 점이 민중들의 불만을 샀던 기록을 보여준다. 이런 내용을 보며 대장동 개발로 인한 엄청난 수익을 본 사람들도 이와 비슷하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맞다. 우리는 그래서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가지고, 이를 통해 올바른 방향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저자의 삶과 글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재테크, 주식과 부동산의 가격 그리고 직업의 안정성 등 경제적인 면에 관심이 치우쳐 있는 삶을 살고 있고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한 닫힌 삶을 살고 있다. 주변의다양한 삶의 현장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고 교류하는 열린 삶을 살기가 쉽지는 않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람과 행복, 만족과 같은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끝자락에서 후회하지 않는 삶이란 재산의 양보다 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었는가가 아닐까.

조금은 어렵고 1985년 이전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내용이지만 최근에 읽었던 <김종필 증언록1>과 대비되었다. 증언록은 권력자의 입장에서 쓴 글인 반면 이 책은 철거민이나,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민중들의 처절한 삶의 입장에서 쓴 글이어서 동시대를 극단적인 두 관점에서 보는 기회를 가졌다. 

 

 

'지식인이 민중의 민중성을 돕는 그 범위를 넘어설 수 없으며', '지식인은 오직 민중을 섬기는 존재여야 한다.'라는 지식인의 소명과, 지식인은 민중 현장에서 민중으로부터 배우며 하나 되는 삶을 통해 민중다운 지식인으로 거듭나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6)

일반적으로 빈민은 가난과 무지로 말미암아 자기경멸, 자포자기, 체념적인 생각을 가진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즉 배운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며 부자들을 보기 때문이다. 특히 TV나 신문, 세상 이야기가 모두 가진 자의 것이고 그들을 표준으로 모든 가치 기준이 설정되기 때문이다. 그 기준과 그들의 생활을 보면 자기의 처지가 비참하게 보이기 때문에 더욱 체념에 빠진다. 그러나 이 의식은 곧 저항의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 (47)

이상과 같이 한국의 지역사회 개발이 초기에는 농촌마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1960년대부터는 도시화 산업화 물결을 타고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지역사회 개발이 확산된다. 이러한 추세 배후에 깔려 있는 선진 자본주의의 신식민지 침략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김경동 교수의 글을 여기 인용한다. (72~73)

 선진 자본주의  공업사회들은 과거처럼 전후의 신생 독립국들과 일방적인 제국주의 침탈이나 착취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경제적인 유대를 지속할 길을 찾아야만 했다. 이와 같은 필요에서 착안한 것이 저들 후진 지역, 저개발 사회의 개발과 근대화를 도와주는 일이었다. 물론 초기에는 주로 일반적인 원조의 형식으로 자본을 이전시키는 방법이 지배적이었다가 차차 차관, 직접투자, 합작 등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어쨌든 이런 관계의 정립을 발전이론의 틀에서 설명하게 되면, 우선 과거의 식민지적 제국주의라는 오명을 벗을뿐더러 종전의 식민지들에 대한 보상으로서 개발과 근대화를 도와준다는 윤리적 속죄의 미덕마저 과시하는 효과가 있다. 그보다도 실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적 팽창의 압력을 국제시장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해소시키는 방편을 바로 발전과 근대화의 접근에서 얻을 수 있었다. (김경동, 1983) 

근대화론이든 개발론이든 해방 이후 사회에는 모든 학문이 서구의 선진적 흐름에 흡인되어 있었고, 이는 서구 논리에 압도되어 우리의 지식인들이 선각자적 역할에 광분했던 것과 관련해서 보면 "한국 민족의 전통적 문화나 사회적 가치, 심지어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진덕규, 1983)고 보겠다. (73)

이익 중심의 심화, 발전되면 경제적 개발형으로 나타나고, 가치관 중심으로 심화, 발전되면 인간학적 개발형으로 나타난다. 기독교 교회는 아직 경제개발의 프로그램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 (중략) 따라서 경제적 발전이나 정치적 발전이 교회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할 경우는 인간 개발, 인간해봉, 인간화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86)

그러나 해방 후에는 불행하게도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치열한 좌우 대립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마침내 우익의 대한노총이 그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한국의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권익 증진과 유리된 채 국가권력의 영향권 내에서 벌어진 노동조합 상층부의 귀족화와 어용화에 의해 철저히 왜곡된 길을 걷기 시작했다.(93)

그것은 지속적인 경제개발의 성과와는 역으로 노동자계급의 생활 상태가 더욱 악화된 현실로 인해 임금인상 요구 투쟁이 주종을 이루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절박한 생활상의 요구는 자본가 측의 강력한 반발, 국민경제적 관점이라는 이른바 객관적인 기준을 내세운 정부 측의 개입,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억제시키기에 충분한 노동법상 제약애 의해 항상 미미한 성과나 노동자 측의 패배만을 가져왔을 따름이다. (94)

그 밖의 노동행정의 측면에서는 감사의 미비와 근로자의 희생 위에 이윤 추구만 고집하는 사용자의 전근대적 자본축적 방식이 노동자를 괴롭혔고, 정부에서는 수출목표 달성을 위해 노동 시간을 8시간에서 16시간으로 연장하는 조치까지 발동했다. (96)

'프락시스(praxis)'란 말은 'practice(실천)'와 'axis(축)'가 결합된 말이다. 어떤 행동과 실천을 하는 데에 일정한 축을 이룬다는 뜻이 있다. 민중에게 이 축을 형성하는 것이 곧 의식화 교육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112)

부언해 둘 것은 일반교육학의 업적을 제도 교육과 혼동하지 말고 교육학의 학문적 공헌에 대해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본래 교육학은 사람의 사고, 행동, 동기, 감정, 정서, 총체적인 것을 세분화해서 그 성장과 발달을 돕는 학문이다. (123)

민중은 모순구조 속에서 생겨난다. 억압과 착취구조에서 희생당하는 무리가 민중이다. 또 이를 극복하고 이 구조에서 해방하려는 투쟁을 하는 실체가 민중이다. 그 모순구조나 억압과 착취, 지배의 구조를 영속화하려는 사람은 오히려 지식인이기 때문에 지식인의 '자기해체'가 선행조건이라 볼 수 있다. (139)

베이컨이 인간의 창조적 행위가 오히려 인간의 발전을 저해하는 기생충을 배양하고 있다고 하여 최초의 소외이론을 말한 이후로 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실존주의 철학자들, 교육학자들이 있었지만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것은 제도 중심의 교육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페스탈로치는 갈등의 근본적 원인이 인간성을 부정하는 사회의 계급제도에 있음을 경고한 일이 있다. (중략) 교육제도는 당대의 국가와 민족이 당면한 경제체제와 정치구조와 이념의 틀 안에서 그 국가를 주도해 나가는 세력들(권력자, 경제적으로 부유한 자, 지식인)이 만들어내고 백성을 선도하거나 양육하며 훈련시키고 적응시키기 위해 계획하고 경영을 해나가는 것이다. (140)

 

728x90

 

이와 같은 먹물적인 근성 때문에 생긴 고민을 해결하려는 필자의 해답은 민중의 언어를 배우려는 노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녹음기로 언어를 채집하여 앵무새처럼 익혀볼 생각도 했지만 생활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는 스승의 말씀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145)

'남편이 워낙 고생을 안 하고 자라서 생활력이 없고 열심히 살려는 자세가 되지 못하니까 시아버지도 "못난 놈"이라고 하신다.' 이 부인의 이야기는 옳다. 대학까지 나오려면 공부만 했을 테고 미팅이다 등산이다 부모가 대주는 등록금으로 편안히 지낸 그가 생활 현장에 적응될 리 없다. 경비원도 싫고 노동도 싫다.(182)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모든 파출부가 다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하도 수상하여 사람이 사람대접을 잘 해주지 않는 풍토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인명이 경시되고 인격이 무시되고 인권이 짓밟히는 세상이 되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면 이게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있으되 사람다운 사람이 드문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씁쓸하기만 하다. (195)

하느님은 민중 속에서 민중과 더불어 일하고 계시다고 성서에서 확인된 이상 우리는 민중 속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 일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교자의 자세 및 신앙이며 신학자의 학문적 양심이며 운동가의 과제로 보인다. (198)

노동자 출신의 시인 박노해는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에서 노동자의 처지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읊고 있다. (210)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임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이상과 같은 현상을 노동자의 문집 수기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더 확실한 것은 노동자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야 알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민중성 이해를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집단성, 공동체성 속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개인적 민중성은 영웅이나 진인은 될지라도 사회운동적인 민중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집단, 공동체적 민중성을 찾아야 한다. (214)

 

민중극은 민속극, 마당극, 연희, 역할극, 촌극, 마당굿, 판놀이, 대동놀이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민중극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221)

민중과의 놀이에 도취되어 있는 동안 양반의 권위와 기득권이 무너지거나 양반은 그 권위를 망각하게 된다. 이것은 놀이판이 가지는 신명성 때문일 것이며 놀이에는 체면이나 가식을 챙길 자리가 없는 것이다. (228)

결국 장산곶매는 민중인 마을 사람을 지키는 수호신이며 매와 마을 사람은 혼연일체이기 때문에 기쁨과 고통, 삶과 죽음이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 무당의 입을 통해서 '몸주님'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매는 민중신앙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234)

기독교는 더욱 노동, 농민, 빈민 현장으로 들어가서 생생한 민중의 언어를 경청해야 한다. (245)

즉 현실 유지를 위한 적응교육이 인간을 노예로 만들 뿐만 아니라 사냥개를 훈련시키듯 인간을 물화해 버리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 머리에 지식이 많은 사람은 선각자이며 그 선각자가 언제나 옳다는 판단에서 어떤 인간의 행동을 계획적으로 성장시키고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생각을 가지는 것이 빈민지역에서 교육선교를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261)

실로 가진 자(지식, 제물, 권력 등)들은 현실유지나 체제 옹호자에 불과하다. 그 현실이나 체제란 거대한 교조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삶의 본질이나 인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기껏 풍류나 유행, 첨단, 쾌락을 추구할 수 있어도 만족이나 고뇌를 통한 인간성 발견, 또는 몸부림이나 투쟁을 통해서 얻은 생의 감격, 기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후자의 정서는 민중에게 훨씬 가깝다. (263)

 

교인, 교회 건물, 교회의 물적 자원이 민중의 열망과 꿈을 채워주고, 저들의 형태를 통해서 이 민족을 구원하도록 교회는 민중을 향해 개방되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전도의 실천이며, 선교의 정형이다. (273)

민중운동가는 민중을 뚜렷한 대상으로 잡고 객관적인 사실과 현상을 효과적으로 제시하여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니 가치 설정을 하게 되며, 민중이 따라오도록 유도하고 잘못된 사회체제를 부정하면서 그 현실을 바로잡도록 한다. (319)

이상과 같이 넝마주이 집단의 일반적 이해 아래 필자가 동거했던 집단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보통 이들은 한 '조마리'(업주 혹은 오야지를 그들은 이렇게 부른다)를 중심으로 모인다. (326)

서로 감추지 않고 경계하지 않고 자기를 폭로하여 서로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대화다. 이 대화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수양하게 될 뿐 아니라 남을 수양시키며 그래서 우리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남을 사랑할 줄 알고 자기를 사랑할 줄 알게 된다. 이 대화를 통해서 남을 신뢰하게 되고 자기도 신뢰하게 된다. (345)


독서습관498_70년 80년대 노동자 철거민 등 민중교육론에 관한 성찰_스스로 말하게 하라_허병섭_2009_학이시습(211219)


■ 저자 : 허병섭

1941년 김해에서 가난한 민중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한국신학대학교에 입학해 1969년 동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군목 시절 청계천에서 빈민들을 만났으며,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빈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1976년 가난한 주민들과 함께 하월곡동 산동네에 동월교회를 개척하고 그들과 함께 살면서 일하고, 국악 찬송 등 한국적 예배와 민중적 신앙고백을 몸으로 실천했다. 또한 1981년 한국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를 설립, 소장을 맡으면서 민중교육론을 연구하고 <스스로 말하게 하라>(1987) 등을 저술하여 교육이론을 현장에서 실천했다. 이 책은 한국적 민중교육이론을 최초로 제시한 것으로, 이후 현장에서 민중교육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90년 마지막 기득권이던 목사직을 버리고 1994년까지 미장공이 되어 건설노동자들과 함께 '월곡동 건축일꾼 두레'를 만들어 건설노동자 생산협동공동체를 시도했다.

 그러나 생태계를 파괴하는 소비의 근원지인 도시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 나눔과 섬김, 공생의 가치가 담긴 생태적 관점으로 세계관이 확대되자, 1996년 4월 무주로 귀농하여 땅을 일구며 생태 생명운동에 뜻을 두었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대안학교인 무주 푸른꿈 고등학교 설립추진위원장으로서 대안학교 설립에 기여했으며, 2005년부터 온 배움터(전 녹색대학교) 대표를 맡으며 생태 생명운동과 교육에 헌신해 왔다. 

 평생 가난한 사람들과 벗하고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지향하며 빈민운동과 생태 생명운동 그리고 민중교육운동을 몸으로 실천해 왔다. 최근에는 자신의 전 재산인 땅과 집을 자연 생태 보존을 위해 자연환경국민신탁에 기증했다. 현재는 부인과 함께 의식불명의 뇌병증으로 투병 중에 있다.(2012년 별세)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