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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강의

[강의]모차르트 시대를 넘어 나폴레옹을 좋아했던 베토벤의 삶과 작품_민은기 교수

by bandiburi 2025. 4. 24.

베토벤 (출처: picryl)

서울대 민은기 교수의 베토벤에 대한 강의로 베토벤의 삶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구나 강의에서 소개되는 곡에 대한 짧은 피아노 연주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베토벤에 대해 책을 통해서 접했던 단편적인 정보들이 강의를 들으며 하나로 결합되었다. 

베토벤의 삶은 유럽 역사의 큰 변혁기를 경험한다.
바로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와 유배 그리고 다시 왕정복고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민은기 교수는 시간을 너무 짧다고 느낄 만큼 베토벤의 삶과 곡에 대해 재미있게 설명했다.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고 민은기 교수의 책도 읽어 봐야겠다.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에 민은기 교수가 쉴 때 즐겨듣는 클래식 음악이 있는지 물었다. 
음악만 나오면 분석하려는 직업병이 있어 듣지 않는다고 해서 참석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 레스토랑에 가서 음악이 나와도 자신도 모르게 분석하려 해서 소리를 줄여달라고 청할 정도다. 

아래에 강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했다.


Eugene Lami (출처: Wikimedia Commons)

Eugene Lami은 1840년에 베토벤 7번 교향곡을 듣고 난 뒤의 청중들의 표정을 그렸다.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음악을 통해 영적 감화를 받고, 지적인 감동을 받은 자세다.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베토벤이 음악사에서 이룬 가장 큰 혁신이다.


음악은 역사와 함께 했다. 4만 3천년 전에도 뼈로 피리를 만든 흔적이 있다. 가장 오래된 악기다.

인간이 음악을 계속했다는 것은 지구상에서 생존하고 번식하는데 음악이 기여했다는 의미다. 음악을 가진 공동체는 생존했다. 지구상의 포유류 중에 인간이 36%다. 나머지 대부분은 가축이다. 그 외에는 4%에 불과하다. 아이를 달래고 안심하게 만드는데 자장가가 있다. 자장가도 생존에 기여했다.

베토벤 이전 음악의 목적은?

공동체의 공통된 신념이 종교다. 종교적인 감흥이 지속돼야 하는데, 음악이 인간에게 강렬한 종교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종교적인 전례는 성속이 분리돼야 한다. 노래를 하는 게 중요했다. 교황이 베드로 성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 종교적 음악을 사용한다. 노래를 부른다. 음악이 없는 종교가 없다. 종교가 없는 음악이 없다고 한다. 종교에서 음악이 없는 전례가 없었다.

음악을 가지고 사람들이 즐기기 시작했다. 오락과 친교에 이용했다. 16세기에 들어서야 음악을 듣고 놀 여유가 생겼다. 음악을 가지고 노는 사람을 아마추어라고 불렀다. 진짜 좋아서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먹고살기 위해 하는 사람은 프로다. 직업을 가질 필요 없이 좋아하는 음악만 하면서 살 수 있어라는 생각이 아마추어 그들의 자부심이었다. 남들이 못 갖는 여유를 가지고, 악보를 볼 수 있는 것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음악은 악보가 복잡해서 인쇄하는 게 고가였다. 최초의 악보 사진을 보면, 악보를 4면에서 볼 수 있도록 했다. 친구들이 함께 보면서 놀 수 있다. 네 명이 만나서 노래를 부르면 함께 부를 수 있지만, 얘기하면 한 명이 얘기하고 나머지는 들어야 한다. 노래는 함께 하며 하모니를 이룰 수 있어 좋다. 당시에 친구들이 오면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고급스러운 취향을 나누며 즐겼다. 아무나 즐긴 게 아니다. 남들 못하는 것을 하면서 놀았다.

연주하는 모차르트 (출처: picryl)

모차르트 시대의 작곡가: 요리사 수준

모차르트가 연주하는 중에 왕족과 귀족들이 음악을 듣는 그림이다. 8살 모짜르트가 궁전에서 연주하고 있다. 사람들은 연주 중에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떠들었다. 모차르트는 왕이 원하는 것을 작곡했다. 그런 곡을 연주할 때 왕이 경청했을까.

Mozart Piano Sonata am K.310는 귀에 꽂히는 두 개의 선율이 있다. 제1주제와 제2주제다. 이 곡은 모차르트가 자기 제자를 위해서 작곡했다.  (강선우 피아니스트의 짧은 연주가 있었다)

쾨헬(Köchel)이라는 번호는 뭔가.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 중에서 무엇이 먼저 작곡한 것이고, 진품인지 확인한 학자 중에 쾨헬이 있었다. 쾨헬이 일련번호를 붙인 것이다. 

모짜르트는 너무나 깔끔하게 작곡했다. 악보는 머릿속에 두고 출판사에 넘기기 위해서만 썼다.

모짜르트를 존경했던 베토벤은 곡을 쓰고 싶을 때만 썼다. 그리고 마음에 들 때까지 고쳤다. 죽어라고 고쳐서 악보가 너덜너덜하다. 자기가 이건 작품이라고 하는 것만 Op(라틴어 작품을 의미) 번호를 붙였다. 곡을 대하는 자세가 달랐다. 그의 곡은 코드들이 수렴하면 어떤 큰 축으로 수렴한다. 겉으로는 화려한 선율과 리듬이지만 화음이 되고 큰 골격을 이루는 유기체적 성격을 띤다. 어디서든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있다.

Beethoven Piano Sonata CM No.3 Op.2-3 제1주제와 제2주제. 제2주제를 일부러 흩뜨려놓는다. (제시부만 강선우 피아니스트가 연주)

닮고 싶었던 선배 모짜르트조차 하인, 교회 사제라고 여겼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가발을 썼다. 귀족 앞에는 가발을 쓰고 갔다. 고용계약서에 그렇게 하도록 명기되어 있다. 주군한테 말걸지 말고, 유니폼 입어라, 아침마다 와서 무슨 곡을 연주할지 보고하고 지시받는 등 주문생산하는 위치가 요리사 정도의 하인이었다. 그들과 같이 밥을 먹었다.

베토벤 시대의 작곡가 위치: 예술가

베토벤은 가발을 쓰지 않았고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사고를 치고 싸우고 해서 빈에서만 집을 70번 옮겨 다녔다.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시대가 하이든과 모짜르트 때와는 달리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1789-1794)으로 기존의 질서가 깨졌다. 베토벤은 1777년에 본(서독의 수도) 태어나, 19살에 대혁명을 겪었다. 본은 쾰른 선제후의 궁전이 있었던 곳이다. 중부유럽이 신성로마제국이었고, 황제를 뽑는 선제후가 사는 도시는 중요한 곳이었다.

베토벤의 가족

할아버지가 바로 선제후의 궁전의 악장이었다. 네덜란드에서 스카웃되어 본으로 이주했다. 할머니가 알코올중독자였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수녀원에 보내고 혼자서 아들을 키운다. 하지만 아들이 자신보다 음악을 잘 못했다. 게다가 부인도 평민출신에서 골랐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심각한 알콜중독에 빠졌다. 아내는 존재감 없이 아버지가 아들 베토벤을 학대하는데 아무런 역할도 못했던 무능한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알콜중독에 빠졌고, 남동생 둘이 있어 베토벤은 소년가장이었다.

막시밀리안 프란츠 선제후(1784-1801 재위) 고르프리프 네패(1748-98)가 베토벤을 알아봤다. 불우한 가정환경이었지만 시작은 좋았다. 요제프 2세가 죽고 레오폴드 2세가 황제로 즉위했고, 이를 기념하는 칸타타를 20세의 베토벤이 썼다. 1790년 본에서 베토벤을 만난 하이든은 빈으로 와서 자신에게 배우라고 했다. 베토벤은 힘든 시기를 겪은 본을 떠나 빈으로 갔다. 베토벤의 후원자 발트슈타인 백작이 축사를 썼다.

카를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베토벤의 엄청난 팬이어서 자기 집으로 와서 살게 했다.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관계가 틀어졌을 때 베토벤은 공작에게 충격적인 편지를 썼다. '당신은 태어나니 공작이지만, 나는 나다'는 내용이다.

베토벤과 청각 상실과 스타일 변화

베토벤은 청각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성공만을 위해 달려왔는데 귀가 안들리면 음악가로는 끝나는 거다. 곡을 쓰다 가 장문의 유서를 썼다. '사실 나는 못 듣는다. 일부러 사람들이 나에게 오지 못하게 했다. 정말 외로웠다고' 유서를 썼다. 죽고 싶은데 아직 죽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나에게 의무를 부여한 것 같다고 했다. 1804년부터 작곡스타일이 바뀌었다. 영웅적인 음악이다.

초자연적인 영웅이 나타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이런 서사를 항상 꿈꾼다. 영웅서사를 음악에 가지고 왔다. 음악이 격렬하다. 영웅의 등장이다. <영웅>교향곡. 16분 동안 1악장이 계속된다. 영웅은 또 고초를 이기고 살아남아야 하니 2악장은 장송행진곡이다. 격렬하게 달려가는 싸움 장면이다. 영웅은 반드시 이긴다. 승리해서 이기는 4악장 구조를 썼다. 이것이 먹혔다.

이 시대는 나폴레옹 시기였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그 분위기가 퍼지는 것을 주변국은 우려했다. 혁명의 영향을 받을까 봐 프랑스와 관계가 좋지 않을 때 나폴레옹이 등장했다. 이집트 원정을 갔다 파리로 돌아와서 통령이 되었다. 이 당시 영토가 지금의 유럽이다.

나폴레옹은 인기가 많았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너무 좋아했고, 동년배다. 빈이 나폴레옹에 두 번 점령 당한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했을 때, 베토벤은 '너는 다를 줄 알았는데 너도 인간이구나'라며 실망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을 기리며 작곡한 <교향곡 3번 영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웠다. 나폴레옹이 보여줬던 영웅의 서사를 가지고 10년 동안 작곡을 하게 된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에는 두 곡이 있다. <열정>과 <발트슈타인>이다. 모두 어려운 곡이다. 피아니스트가 하기 어려운 테크닉이 많다. <발트슈타인>은 자신을 후원해 준 Ferdinand von Waldstein에게 헌정한 곡이다. (강선우 피아니스트의 연주곡을 들었다. 보기에도 어려워 보였다) 격렬하다. 베토벤 하면 악마적인 힘, 폭발할 것 같은 추진력이 떠오른다.


베토벤이 정말 아꼈던 악기: 피아노

피아노는 1720년경 바흐가 살아있을 때 발명됐다. 피아노 전의 악기는 합시코드라고 뉴트를 뉘어서 연주하는 아이디어로 만든 악기다. 현을 뜯었다. 꽤 큰 소리가 난다. 현을 활로 문지르는 것과 뜯는 게 있다. 뜯으면 건반이 오르고 내리는데 현에서 나는 음량이 똑같았다.

이후 망치, 해머로 두드리는 장치를 만들었다. 힘이 너무 약해서 나왔을 때 악기에 대해 별로라고 해서 오랫동안 안 썼다. 베토벤 시기에 많이 개량이 되어, 철제 프레임이 도입되고, 옥타브를 구현하기 위해 긴 현을 X자로 배치해서 꽤 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영국 브로드우드사에서 1818년에 개량 피아노를 만들었다. 동일한 음을 치고 또 쳐야 했다. 당시의 악기는 치면 바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당시의 작곡은 지금의 피아노 성능이라야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베토벤은 당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손들을 위해서 남겼다고 했다.

나폴레옹 이후 왕정 복귀와 왈츠의 성행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빈털터리로 돌아오고, 유배를 가고, 유럽은 다시 왕정으로 돌아간다. 1812년부터 1814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사람들이 왕정으로 돌아가며 혁명에 대한 단속이 심해졌다. 사람들은 놀기 시작했다. 왈츠가 성행했다. 빈에서 베토벤보다 롯시니의 왈츠가 더 유명해졌다. 격렬한 음악이 너무 거창하게 느껴졌다. 베토벤은곡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전에는 교향곡이 1년에 한 편은 나왔었다. 하지만 10년 동안 베토벤은 침묵했다.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불멸의 여인을 만났다. 한 번도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대상이 누구냐고 학자들마다 논쟁이 되었다. 베토벤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사랑을 했다. 사후에 여인이 더 먼저 사랑해 결혼해 달라고 했고, 유부녀였던 그녀의 남편도 베토벤을 잘 알았다. 이 관계가 10년 동안 끝난다. 정말 사랑했던 여인과 결별했던 아픔 때문에 곡을 못썼을 거라고도 한다.

베토벤과 조카

동생이 둘이었는데 한 동생만 아들 하나를 두고 모두 일찍 죽었다. 동생은 베토벤에게 아들을 부탁해 후견인이 되었다. 죽기 사흘 전에 엄마와 공동후견인으로 하고 죽었다. 베토벤이 굳이 소송을 해서 단독후견인이 되기 위해 5년을 끌어 결국 이겼다. 조카를 데려왔으나 조카는 권총자살을 시도했다.

베토벤이 부활을 시작한다.

소나타로 시작해서 교향곡을 작곡했다. 영웅이 빠졌다. 인류 보편의 평화를 도입한다. 연말에 어느 나라나 예외 없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튼다. 승리이자 환희다. 성악을 넣었다. 그전까지 성악과 기악은 별도였다. 소리를 내는 악기에 사람의 목소리를 악기처럼 사용했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리라고 하며 끝난다. 베토벤이 이 곡을 연주했으나 환호성을 듣지 못해서 연주자가 알려줬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이후 아팠다. "박수를 치게, 친구들, 연극은 끝났다네!" 그리고 영면에 들었다. 베토벤은 신격화되었다.

(출처: picryl)


피아노 콘체르토 5번은 악단과 함께 연주하는 것으로 솔리스트가 빛나는 연주다.

 

9번 교향곡을 쓰면 죽는다는 저주

우연인데, 구스타프 말러가 저주가 있다고 믿었다. 말러는 굉장히 아팠던 사람이다. 어려서 아꼈던 동생들이 죽는 걸 경험하며 살았다. 한 동생은 성장해서 자기 앞에서 권총자살을 했다. 심장질환을 앓아서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 직속 선생인 브루크너도 9번을 쓰고 죽었다. 그래서 9번을 피했다. 번호 대신 대체의 노래라고 했다. 그리고 살았다. 진짜 9번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리고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주라고 붙였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9번까지 작곡한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악기까지 고려해서 하나의 유기체가 되게 긴장감을 유지하며 교향곡을 쓰는 거다. 사람들이 영혼의 감화를 받으려 음악을 듣는데 이를 쓰는 게 얼마나 어렵겠나. 하나나 두 개를 쓰는 것도 어렵다. 9개까지는 정말 대단한 거다.


베토벤 음악은 3분짜리 음악과 완전히 다른 감동

모든 음악은 다 치유의 능력이 있다. 위로를 받거나 감정을 동화시킨다. 카타르시스, 영혼의 정화까지 느끼려면 베토벤의 음악을 듣자. 그 강도가 주는 음악은 3분짜리 음악과 완전히 다르다. 베토벤의 음악이 귀한 줄도 모르고 흘려듣는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소중하게 생각할 때 느끼는 감동도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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