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와닿는 부분은, 시종일관 어머니의 투병과 때 이른 죽음이라는 무거운 상실의 시간을 견디면서도 음식을 만들고 나누고 추억하면서 부지런히 자기 치유와 타인과의 연결과 소통을 도모하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저자의 건강한 삶의 태도였다. 살아가면서 아무리 막막한 순간이 오더라도 어디엔가는 반드시 당장의 숨구멍을 만들어낼 여지가 있고, 하루하루 그런 반짝이는 구멍들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의무라고 그가 말하는 것만 같았다. (406)
책의 말미에 옮긴이가 요약한 위의 문장이 <H마트에서 울다>를 잘 소개하고 있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저자 미셸 자우너의 자서전적 글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세계를 떠돌다 미국에서 자란 저자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한국 문화를 정기적으로 흡수한다. 미국에서는 아시안으로 무시를 당하지만 한국에서는 작은 머리를 가진 예쁜 아이로 부러움을 받는다.
사춘기를 지나며 부모와의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은미 이모의 암 투병 후 죽음의 경험 이후 곧이어 찾아온 엄마의 암 투병과 죽음의 과정은 저자에게 상실의 고통과 함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기회가 된다. 한국에서만 살아온 입장에서 이민자 2세들의 관점에서 삶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단순히 미국이란 국가가 아닌 한 사람의 주체로서 개개인을 바라보게 한다.
덩치는 크지만 나약해 보이는 미국인 아버지와는 달리 작지만 강인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어머니의 암 투병 과정은 구체적이어서 저자의 힘겨움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말기암 환자의 병간호가 가족들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다음은 책에서 인용하고 싶은 문장과 소감을 포스팅한다.
그에게 내가 지금 얼마나 우리 엄마를 그리워하는지 아느냐고 말해 주고 싶다. 어머니한테 더 잘 대해드리라고, 삶은 허망해 어머니가 언제 훌쩍 떠나가버릴지 알 수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22)
엄마의 죽음으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그리움만 남았다. 저자는 독자에게 강력하게 요구한다. 연락할 수 있고, 찾아가 볼 수 있는 엄마와 아빠가 세상에 함께 호흡하고 있을 때 잘 대해드리라고 한다. 갑작스럽게 훌쩍 떠나버린 뒤에 후회하지 않도록.
한국 엄마들은 서로를 자기 아이의 이름으로 불렀다. (...) 나는 그분들의 진짜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 자신의 정체성이 자기 아이들에게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 (140)
우리 사회에도 여성의 정체성이 자식의 이름으로 대체되는 면에 대한 비판이 높다. 산업화 시대에 남자가 경제 활동을 하고 여성은 가사 노동에 전념하던 시대에는 여성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가부장적 사회였다. 지금은 의도적으로 여성의 이름을 부르려는 분위기다. 자신의 이름이 있음에도 자식의 이름으로 불리던 시대가 가고 있다. 바람직한 방향이다.
내가 살면서 해온 모든 일이 터무니없이 이기적이고 하찮게 느껴졌다. 내 자신이 미웠다. 은미 이모가 아팠을 때 이모에게 날마다 편지를 쓰지도, 더 자주 전화하지도 않고, 나미 이모가 보호자 역할을 하느라 고생한 것을 충분히 헤아리지도 못한 내가 미워 죽을 것 같았다. 유진에 더 일찍 오지도, 진료 예약날에 같이 따라가지도 않고, 진작 주의를 기울여야 했을 증상들도 까맣게 몰랐던 내 모습도 미웠다. (148)
주변에 암으로 항암치료를 받는 분들이 있다. 가끔 힘을 더하기 위해 연락하거나 방문하기도 한다. 이런 행위가 은미 이모에 대한 저자의 후회하는 마음처럼 느껴지겠다는 후회를 하게 된다. 바로 옆에서 환자의 고통을 함께 하는 보호자의 힘겨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주의를 기울이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을 찾아봐야겠다.
이 사람은 내 아빠였고 나는 아빠가 침착하게 나를 안심시켜 주기를 바랐다. 나를 들들 볶아대서 이 절망스러운 길을 외롭게 걸어가도록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아빠 앞에서 울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아빠는 분명 내 슬픔에 자기 슬픔을 얹을 터였다. (155)
저자의 아버지는 덩치는 크지만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제대로된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좌충우돌 사춘기를 겪었다. 그래서 암 투병하는 아내를 돌보는데 서툰 모습을 보인다. 딸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저자의 솔직한 심정이 적힌 책을 읽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한국 여자 셋이 합류하기로 했다. 일종의 인력 총동원 전략이었다. 친구, 가족, 병원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말하기를 간병하는 사람이 자기 시간을 가져야 환자를 더 잘 돌볼 수 있다고 간곡히 내게 말했다. 서로 돌아가면서 엄마를 돌보니 각자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겨 엄마 식단에도 더 신경쓸 수 있었다. (159)
한 명의 암 환자를 돌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지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사람을 계속해서 돌보는 것을 어려운 일이다. 건강한 사람이 아닌 침대를 떠날 수 없고 기력도 없는 환자를 24시간 돌봐야 한다. 대소변을 처리하고 욕창을 예방해야 하고, 세탁물을 처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수시로 돌보며 약 복용을 도와야 한다. 저자는 어머니를 간병하며 이 모든 과정을 겪었다. 이때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감당할 수 있었다.
"아침마다 집 주변을 산책하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했다. "식물에 물도 주면서 자라는 것도 보고." 아주머니는 현명했고 우리를 감화시켰다. 특히 겁먹은 내게 다시 희망을 불어넣어주셨다. (161)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암 투병 중인 어머니를 돌보는 저자에게 이런 경험을 많이 해본 아주머니의 조언은 아주 소중했다. 산책이 필요하고, 식물을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잠시 간호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런 것이 삶의 지혜다.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다.
아빠와 나는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고 엄마는 서울에 남았다. 은미 이모의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버스가 도시를 빠져나가면서 불현듯 서울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 어린 시절의 목가적인 유토피아가 뭔가 다른 곳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이제 더는 할머니와 은미 이모가 없는 그곳은 내가 속한 곳이라는 느낌이 조금 희미해졌다. (194)
저자와 한국을 이어주고 있던 할머니와 은미 이모라는 끈이 사라졌다. 친숙한 곳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고향을 떠나 수도권에서 정착하고 수십 년을 살았던 사람들이 고향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고향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소중하다.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엄마가 치료를 계속 받도록 설득하자고 말이다. 하지만 항암 치료는 이미 엄마에게 남은 존엄을 마지막 조각까지 앗아가버렸고,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더 앗아갈 존엄이 남았다면 그것마저 기어이 찾아내고야 말 것 같았다. (...) 하지만 나는 은미 이모 덕분에 알게 되었다. 만약 두 차례의 항암치료가 별 효과가 없다면 그쯤에서 치료를 중단하는 게 엄마의 바람이라는 것을. 그것은 내가 반드시 존중해야 할 결정 같았다. (200~201)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위해 항암 치료를 받는다. 하지만 항암 치료 과정에서 정상적인 세포의 손상으로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고통이 극심하면 인간적인 존엄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항암 치료로 몸이 약해져 결국 죽음에 이르는 길을 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 차라리 항암 치료를 포기하고 인간적인 존엄을 유지하며 살다가 죽음에 이르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암을 치료할 가능성이 희박한데 항암 치료를 받다가 사라지기에는 남은 삶의 소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는 결혼식이 암울한 상황에 한줄기 빛이 되어줄 신의 한 수처럼 느껴졌다. 이제 혈전 용해제와 펜타닐 대신 키아바리 의자와 마카롱과 예식 구두를 가지고 갑론을박을 벌일 수 있다. 욕창과 오줌줄 대신 배색과 올림머리와 새우 칵테일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 결혼식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지켜내야 할 무엇이자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될 축하 행사였다. (220~221)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는 엄마의 암투병 과정을 보며 저자는 결혼을 결심한다. 어머니가 생존해 있을 때 사랑하는 동료 피터와의 결혼식을 진행한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은 잠시나마 희망과 빛이 되어 설레는 마음을 준다.
엄마는 단순히 주부나 엄마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엄마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두 역할을 독선적인 태도로 얕잡아보았다. 양육과 사랑을 택한 사람에게도, 돈을 벌고 창작 활동을 하려는 사람이 얻는 만큼의 성취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269)
저자는 이전에 엄마의 사랑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주 특별한 존재였던 엄마를 간호와 상실의 고통 속에서 특별한 존재로 만났다. 엄마를 이해하는 순간이다. 자신의 성질을 다스리며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성숙한 존재가 되었다.
이제 우리 인생을 살 때였다. 피터와 나는 뉴욕에 가서 살아보기로 했다. 일단 거기서 종일 근무 일자리 두세 개로 버티면서 제대로 된 일을 찾아보려고 했다. (325)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남편인 피터와 저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시간이다. 저자는 한국음식을 만들고 나누고 소통하며 회복의 길을 간다. 음악이 성공하며 국내외 공연을 다니는 삶을 산다. 엄마의 고향인 서울에도 공연을 위해 방문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모와 같이 음식 먹는 일이 나에게 얼마나 뜻깊은지를 이모에게 설명하려 애썼다. 음식을 통해 엄마에 대한 기억들을 되살리려고 애써왔다는 것도, 계씨 아주머니 때문에 내가 진짜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느끼던 순간도 (...) (340)
책에는 시종일관 한국음식에 대한 소개가 이어진다. 모든 서사에는 음식이 언급된다. 단순이 요리명만 나오지 않고 자세한 레시피가 등장한다. 음식과 관련된 사연도 소개된다. 엄마의 암투병과 간호라는 지난한 과정을 서술하면서도 틈틈이 한국요리가 언급된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이다.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김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치유법이었다. (360)
한국어가 서툰 저자는 엄마에 대한 생각과, 영어로 진행하는 유튜브 망치 여사의 도움을 받으며 요리를 한다. 그리고 치유를 경험한다.
엄마가 사라지고 나니 이런 것들을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록되지 않은 일은 엄마와 함께 죽어버렸으니까. 한낱 기록과 내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엄마가 남긴 표식을 단서로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오롯이 내 숙제가 되었다. (...) 자식이 엄마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이, 한 주체가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기록 보관인을 기록하는 일이. (371~372)
어리가 남긴 기록은 어떤 식으로든 뒤에 남은 사람들에게 표식을 남겨두는 활동이다. 우리는 기록을 보며 추억을 회상한다. 이 책은 엄마에 대한 저자의 기록이다.
세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나눠준 망치 여사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당신은 연결과 의미를 찾는 데 무수히 많은 길을 비춰준 빛이다. 당신의 따듯함과 관대함에 온 마음으로 감사 드린다. (399)
'망치 여사'라는 음식 만드는 방법을 영어로 소개하는 유튜브를 찾아봤다. 한국어적인 영어로 자신있게 다양한 한국요리를 소개하는 분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쓰고 난 뒤에 망치 여사의 유명세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재능을 나눌 수 있다. 망치 여사는 영어권 국가에서 한국 음식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 만들어 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나눔이다.
이민자에기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언어와 문화의 장벽까지 겹쳐 서로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예민한 사춘기를 지나며, 그 장벽은 점점 견고해지기만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기 암 선고라는 시련을 계기로 자우너는 어머니를 이해하고 망가진 관계를 복원하려는 지난한 여정에 용감하게 나선다. (403)
독서습관 881_H마트에서 울다_미셀 자우너_2022_문학동네(240427)
■ 저자: 미셸 자우너
몽환적인 슈게이징 스타일 음악을 하는 인디 팝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가수이자 기타리스트다. 2016년 1집 <저승사자 Psychopomp>로 데뷔했으며, 2017년 2집 <다른 행성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소리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는 <롤링스톤> 올해의 앨범 50에 선정됐다. 2021년 3집 <주빌리 Jubilee>가 빌보드 2021 상반기 최고 앨범 50에 선정되며 전 세계 주요 음원 차트에서 상위권에 올랐다. 북미,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발히 투어 공연을 하고 있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는 그래미 어워드 후보에 두 번 올랐으며, <H마트에서 울다>는 뉴욕 타임스에서 29주 이상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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