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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독서습관94_조선시대 서양의 발전을 받아들였다면_서유견문_유길준_2004_서해문집(180809)

by bandiburi 2018. 8. 9.

저자 유길준은(1856~1914) 16세 때 개화파 영수 박규수에게 가르침을 받아 해외 사정에 눈떴다. 1881년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신사유람단에 참가해 일본을 방문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경영하던 게이오 의숙에 입학해 한국 최초로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28세 때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명, 보빙사 수행원으로 미국에 가서 한국 최초로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미국 유학 중 갑신정변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연금 생활을 하면서 <서유견문>을 집필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참의, 군국기무처 회의원이 되었으며 동부승지, 형조참의, 예조참의를 거쳐 의정부 도헌에 임명되었다.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자 일본으로 망명, 11년간 망명생활을 하였다. 흥사단과 융희학교를 설립하였고 노동야학회 고문, 국채보상금처리회장으로 활동하였다. 58세 때 중앙학교장으로 선임되었고, 이듬해 노량진 조호정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배웠던 이름 유길준과 그의 책 <서유견문>, 하지만 저자와 책의 이름을 외우고 그 특징이 어떻고 시험을 위해 무작정 외웠던 기억이 있던 책이다. 도서관에서 블로그 관련 책을 찾다 우연히 접하게 된 두툼한 책으로 인연이었던지 이참에 읽어보자는 용기가 생겼다. 

 1884년 갑신정변 전후로 일본과 미국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유럽을 거치며 저자가 체류하고 돌아보며 정리한 것들을 백과사전처럼 조목조목 정리한 책이다.

 책의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19세기 말에 기록된 책이기에 공자 맹자의 좋은 글을 적어놓은 것처럼 고루한 면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비록 번역자의 노력이 있었지만 오늘 우리가 상식이라고 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담고 있음에 놀랐다. 

 특히 반가운 것은 요즘에 보기 힘든 19세기 말의 귀한 사진들이 군데군데 발견된다는 점이었다. 난생 처음보는 사진과 삽화도 많았다. 귀한 책이다. 

  • 책의 시작은 지리학으로 시작된다. 6대주, 세계의 바다, 강, 호수, 인종, 물산
  • 나라의 권리와 국민의 교육
  • 국민의 권리와 인간 세상의 경쟁
  • 정부의 시초, 종류, 정치제도
  • 정부의 직분
  • 세금 관련
  • 정부에서 국채를 모집하는 까닭
  • 교육하는 제도 및 군대를 양성하는 제도
  • 화폐의 근본
  • 당파를 만드는 버릇과 건강을 돌보는 방법
  • 어린이를 양육하는 방법
  • 서양 학문의 내력
  • 상인의 대도 및 개화의 등급
  • 결혼하는 절차, 장사지내는 예절, 친구를 사귀는 법, 여자를 대접하는 예절
  • 옷 음식 집의 제도
  • 놀고 즐기는모습
  • 빈민 수용소, 병원, 정신박약아 학교, 정신병원, 농아원, 맹아원, 교도소, 박람회 등
  • 증기기관, 기차, 기선, 전신기, 전화기, 회사, 도시의 배치
  • 각국 대도시의 모습, 미국의 여러 대도시, 영국의 여러 대도시
  •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벨기에의 대도시 
나라에서 보내준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가서 머물면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한 유길준이란 분에 대해 공감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이런 개화 지식인들이 제대로 이 나라에서 영향력을 미쳤다면 일본 식민지 시대를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세상은 같은 것 같지만 다른 점이 많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 아이들이 시험을 위해 문제와 답을 외우고 수학 문제와 씨름하는 것이 여행을 두루 하면서 세상의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미래를 꿈꾸고 이루기 위해 즐거이 도전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비참한 일이다. 

 대한민국에서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법관이 되고 의사가 되어 돈을 추구하며 그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것도 학생들이 학원, 과외, 성적을 바라보며 맹목적으로 돈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 주변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자신의 행복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오직 남에게 보여줄 학벌과 돈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처절한 철학적 사색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읽어가면서 당시의 조선과 서양 문명의 차이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시대상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면에서도 추천한다. 
다만 유길준 자신의 경험과 조사에 기초해 작성한 책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함께 많은 부분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을 번역한 것이라는 점이 한계이며 아쉬운 점이다. 
 
이하는 책의 내용에서 발췌했다. 
 
[101] 그러나 놀고먹는 사람이 많은 나라는 자기 나라에 물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 재주와 지력이 부족하여, 자기 나라의 천연자원으로 다른 나라의 가공품을 사 들여와야 한다. 
[130] 도덕은 사람의 마음을 교화시키고 인도하여 윤리의 기강을 세우고, 말과 행동을 삼가도록 하여 인간 세상의 교제를 관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이 없을 수 없다. 재예 사람의 슬기를 길러 내어 사물의 이치에 이르게 하며, 근본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의 효용을 헤아리도록 하여 인간 세상의 지식을 관할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이 없을 수 없다. 공업은 마음과 힘을 다하여 제조하거나 운용하는 온갖 것에 관계되고, 인간 세상의 살길을 이뤄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이 없어서도 또한 안 된다. 
[162] 야만인이라는 말은 그 사라의 천품이 본래부터 야만스럽게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하여 지식이 깨우쳐지지 않았으므로 사람의 도리를 행하지 못하는 자를 가리킨다. 
[173] 우리가 상세히 연구할 것은 유럽과 아메리카 두 주에 있는 여러 나라가 아시아주 여러 나라에 비하여 백 배나 부강하다는 사실이다. 누구든 자기 나라가 부강해지기를 바라지 않겠는가마는, 정부의 제도와 규범이 달라서 이같은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재주와 지식에 등급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결단코 그렇지 않다. 
[183] 정부가 해야 할 가장 큰 조목은 국민들로 하여금 저마다 힘과 재주를 다하여 자기들의 옷, 음식, 거처와 같은 모든 생계를 마련케 하고, 조금이라도 동요하지 않게 하며,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있게 해 주는 것뿐이다. 
[257] 어려서 배우는 까닭은 장년에 실행하기 위해서다. 이제 천하 각국에서 배우는 자들의 본심을 살펴보면, 실제적인 효과가 있기를 구하고, 헛된 이름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공부를 독실히 하여 인간 세상의 편리와 안락을 도울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가르치는 제도의 진실함은 이러한 점을 통해서 보는 것이 옳다. 옛사람의 찌꺼리를 주워 모으기만 하고 실용적인 효과가 없다면, 비록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도리어 인간에게 해를 끼칠수 있기 때문에, 실용을 주로 하는 학문이 인생의 대도다. 
[344] 이렇게 가르치고 길러서 어린아이의 나이가 20세가 되면 비로소 성인이라고 불리며, 무슨 일을 하거나 무슨 사업에 종사하든지 잘못이 없으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어른의 간섭이 줄어든다. (중략) 성인이 되면 옷이나 음식으로부터 일상적으로 쓰는 물건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가 부담하여야 한다. 
[345] 다른 나라의 어린아이는 추위와 더위에 따라 적당히 옷을 입히고 배고프거나 배부른 것에 따라 적당히 먹이며 기르는 재미가 극진하지만, 우리나라의 어린아이는 시원찮은 옷이나 음식도 없는 자가 많아 굶주림과 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어린아이는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만, 우리나라의 어린아이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자기의 이름도 쓰지 못하는 자가 많다. 
[351] 학문의 효용과 교화가 어찌 크지 않은가. 어느 서양 학자가 이렇게 말하였다.
" 사람의 지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 후세 사람들이 옛사람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은 학업에 태만하면서 핑계대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마땅히 학문에 힘써 옛사람들이 밝혀 내지 못한 것들을 밝혀 내고, 미치지 못한 것들을 보충하며, 또 새로운 것들을 생각해 내어 옛사람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라야 한다."
[363] 이 무렵에 루터라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본래 예수교 학자이며 아물러 교직자였다. 그는 성품이 충직하고 기상이 호탕하여, 교황이 권세를 전횡하는 것과 헛된 말 꾸며 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교황의 전후 죄악을 문장으로 나열하여 천하의 여론을 불러일으켰는데, 교황이 크게 노하여 역시 조서를 내려 루터를 단죄하였다. (중략) 그런데 독일 황제가 교황을 위하여 루터를 멀리 귀양 보내고, 그의 추종자들을 크게 금하였으며, 나라 안에 명령하여 그의 주장을 논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친구와 제자들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 교황의 처사를 거역하기에 힘을 다하였다. 그래서 그의 무리를 이름하여 '항거당, 프로테스탄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367] 사람이 학업을 닦지 않으면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직업과 직책을 다할 수 없다. 일신상에 관계되는 일도 그렇지만, 한집안의 흥망성쇠도 그 집안 사람들이 학업을 닦았는가 아닌가에 달렸으며, 한 나라의 부강과 빈약도 그 국민들이 학문을 많이 하였는가 아닌가에 달렸다. 학업을 닦는 일이 어찌 크고도 중하지 않겠는가마는 학업은 허명과 실상으로 구별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학업을 허명이라고 하는가? 이치를 캐지 않고 문자만 숭상하여, 청춘부터 백발이 다 되도록 시와 문장 공부만 혼자 즐기되, 그 학업을 이용하고 후생하는 방법을 강구하지 못하는 경우다. 그렇다면 실제적인 학업이란 어떠한 것을 가리키는가. 사물의 이치를 깊이 따져서 자기 본성을 다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여, 오로지 백천만 가지를 실용화하도록 뜻하는 것이다. 
[378]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끼리 교제하는 방법을 살펴보면 모자라는 점을 서로 도와주고 편리한 것은 서로 바꾸는 법인데, 여러 학문의 학자들은 저마다 한 가지 전공을 닦아서 세계의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학문을 어렸을 때에 이수하여, 장성한 뒤에는 효용을 나타내야 한다. 만약 그 학문이 실상을 갖춘 것이 아니라 허명만 있다면, 학문적으로 성과를 얻었다 한들 어디에다 쓰겠는가. 학문에 실용성이 없으면 공부하는 습성이 굳건하지 못하고, 공부하는 습성이 굳건하지 못하면 성과를 이루기가 또한 어렵다. 나라의 커다란 근본은 실용성에 있고, 국민ㅁ의 가장 커다란 실용성은 공부하는 습성에 있다. 
[394] 개화한 자는 천만 가지 사물을 연구하고 경영하여,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기약한다. 이와 같이 하기 때문에 그 진취적인 기상이 웅장하여 사소한 게으름도 없고, 또 사람을 대접할 때에도 말을 공손히 하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여, 능한 자를 본받고 능치 못한 자를 불쌍하게 여긴다. 그러면서도 깔보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야비한 모습을 나타내지 않음으로써, 지위의 귀천이라든가 형세의 강약에 의해 인품을 구별하지는 않는다. 국민이 그 마음을 하나로 합하여 여러 가지의 개화를 함께 힘쓰는 자들이다.
[398] 개화는 실상의 개화와 허명의 개화로 분별된다. 실상의 개화는 사물의 이치와 근본을 깊이 연구하고 고증하여 그 나라의 처지와 시세에 합당케 하는 경우다. 허명의 개화는 사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서도 남이 잘된 모습을 보면 부러워서 그러든지 두려워서 그러든지, 앞뒤를 헤아릴 지식도 없이 덮어놓고 시행하자고 주장하여, 돈은 적지 않게 쓰면서도 실용성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다. (중략)
 사람의 재주는 끝이 없지만, 재물은 일정한 한도가 있다. 만약 자기 나라 국민이 그 재주를 익힌다면 당장 이로울 뿐만 아니라, 그 기술을 국내에 전파하여 그 효험이 후세에까지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외국의 기계를 사들여왔을 경우에 그 기계가 못 쓰게 되면 기계가 다시는 없게 되며, 외국의 기술자를 고용하더라도 그 기술자가 떠나가면 기술자가 다시는 없게 된다. 
[421] 한 사람이라도 놀고먹는 자에게 재물을 주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미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크게는 나라의 법을 범하는 것이고, 작게는 가족에게 후환을 끼치는 셈이 되어, 우리 사회에 한 화근을 만들게 된다. 그러므로 부귀한 집의 자제라도 자기 생업을 영위할 수 있는 길에 종사하여, 부랑 방탕한 자는 평생 수중에 쓸 만한 재물이 없게 되어야 한다. 
[575] 200여 년 전 예수교의 신 구교가 싸우던 시대의 일이다. 그 시대에는 스페인이 강성한데다 구교를 받들고 있었으므로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 국민들을 미워하였다. 스페인 국왕이 큰 군사를 일으켜 네덜란드를 정벌하면서, 격문을 보내고 싸움을 걸었다. 한편으로는 사자를 보내어 달랬는데, "네덜란드가 ㅅ페인의 구교를 받들지 않으면 섬멸당하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라이덴 시민들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과 힘을 합하여 방어할 대책을 강구하였다. 네덜란드의 군세는 보잘것없어서 스페인의 대군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국민들이 죽기를 아까워하지 않고 의기와 용기를 다하여 피 흘리며 싸워, 막강한 적군을 격파하였다. 비상한 대공을 보고하였더니, 정부가 시민들의 뛰어난 공훈을 표창하기 위하여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모두들, "학교를 세워 다음 세대에게 혜택 주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정부가 시민들의 희망에 따라 이 대학을 세워 주었다. 
[586] 유길준의 행적에는 당시 다른 정치가나 관료와는 구분되는 특별한 면모가 발견된다. 유길준은 신사유람단과 보빙사의 수행원으로 일본과 미국에 입국했지만 일행과 함께 귀국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비 유학생 자격으로 1881년 6월부터 약 1년 6개월 동안 근대 일본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경응의숙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1883년 말부터 1885년 초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국비 유학생 자격으로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셀럼시에 머물렀는데, 이때에는 동경대 교수를 지내고 다윈의 진화론을 일본에 처음 소개했던 생물학자 에드워드 모스(1838~1925)의 개인 지도 아래 덤머 아카데미에서 대학 입학 예비교육을 받았다. 어쨌든 당시에 조선인으로서 유길준보다 더 직접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근대 문명과 학문에 접했던 사람은 없었다. 
[588] <서유견문>은 1889년에 탈고되었지만 유길준이 연금 상태에서 풀려나 공직에 복귀한 후에야 비로소 출간될 수 있었다. 유길준은 1894년 일본에 보빙사 사절로 갔을 때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 책의 출판을 의뢰해싸. <서유견문>은 그 다음 해인 1895년 4월 25일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교순사라는 출판사에서 전체 574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장본으로 1천 권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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