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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884]지식의 역사 ⑤_20세기의 과학과 기술 및 예술과 미디어

by bandiburi 2024. 5. 6.

<지식의 역사> 마지막 다섯 번째 포스팅이다. 

20세기에 대한 이야기로 익숙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이 책은 1991년에 출간되어 일부 내용은 40년이 넘은 현재에 보면 어색한 부분도 있다. 

마지막에도 책에서 인용한 문장과 함께 소감을 포스팅한다. 


제13장 20세기의 과학과 기술

그런 이론적 뒷받침 가운데 상당수는 조지 가모브(1904~1968)가 제공한 것인데, 그의 위트와 대중적인 문장 감각 덕분에 우리는 '대폭발'(빅뱅)이라는 표현을 갖게 되었다. 가모브는 우주의 기원과 빅뱅 이론에 관한 여러 권의 대중적인 저술을 펴냈으며,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기본적인 이론적 사고 및 연구 가운데 상당수를 제공했다. (735)

우주 빅뱅 이론의 창시자인 조지 가모브에 대한 내용이다. 지금까지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조지 가모브란 인물을 처음 접했으니....

그 어떤 지식도 확실할 수는 없었다. 지식은 항상 강압적이었다. 우리가 제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하더라도, 뭔가를 완전하고도 완벽하게 알려는 우리의 시도 자체가 항상 엄지손가락처럼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것이었다. (746)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떠오른다. 미시적인 세계로 갈수록 확실히 알 수 없고 확률이 개입된다. 

 

제14장 20세기의 예술과 미디어

1908년 여름 동안 브라크는 프랑스 남부에서 <에스타크의 집들>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세잔풍의 두꺼운 질감, 침침한 색깔, 그리고 이상하게도 뒤틀린 원근법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여름이 끝나자 이 그림을 파리로 가져와서 피카소에게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피카소가 놀라는 한편으로 영감을 얻을 차례였다. (786)

피카소와 브라크의 교류를 설명한다. 서로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에스타크의 집 (출처: flickr)

이 전시회에서 가장 악명을 떨치고 논란을 자아낸 작품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라는 제목으로 전시된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입체파 작품이었는데, 이것은 종종 "판잣집 공장에서 터진 폭탄"으로 불린다. 이 표현은 특히나 적절했던 것이, 뒤샹과 다른 입체파 화가들은 실제로 미술과 사고에 폭발을 시작하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789)

<마르셀 뒤샹>의 책을 읽으며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를 경험했다. 작가의 상상력과 장면을 겹친 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새로운 미술 형식은 기존의 미술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https://bandiburi-life.tistory.com/1630

 

[637]마르셀 뒤샹_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작품과 예술가의 삶을 간접 체험

이 도록은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이자 가장 불가사의한 예술가 중 한 명인 마르셀 뒤샹(1887~1968)에 대한 쉽고 친절한 소개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창의적인 작

bandiburi-life.tistory.com

 

흰색 바탕 위에 검은색과 갈색과 회색의 선이 얽히고설킨 그물을 만들어놓은 폴록의 거대한 작품은 차갑고, 냉정하고, 지적인 느낌을 준다. 다섯 점의 커다란 로스코의 작품은 오렌지색, 자주색, 빨간색의 여러 가지 색조를 이용해 생명의 맹렬한 색깔을 번뜩인다. 폴록의 작품은 몇몇 거대한 무정형 존재의 두뇌였다. 로스코의 작품은 안팎이 다 들여다보이는 그 몸뚱이였다. 폴록의 작품은 수학이고 가설이고 이론이었다. 로스코의 작품은 이론이 제한하고 이해하고자 시도하는 단단하고 피로 가득한 현실이었다. (792)

로스코와 폴록 작품에 대한 설명인데, 모호하다. 

로스코 작품 중 (출처: flickr)

예이츠는 5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찾아냈다. 그는 자신의 이런 탐색이 1916년 부활절에 몇몇 아일랜드인 애국자가 영국인의 손에 처형당한 사건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1916년 부활절>이라는 시에서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태어났다"라고 외쳤다. (797)

아일랜드와 영국간의 어두운 갈등의 시절을 살았던 시인 예이츠의 시를 소개한다. 마치 일제강점기 저항시인과 같은 비장함이 느껴진다. 

그의 마지막 소설 <인도로 가는 길>은 그가 사망하기 무려 46년 전인 1924년에 간행되었는데, 이것은 또 전혀 다른 문제였다. 비록 포스터의 표준적인 관념들을 연상시키는 요소도 일부분 들어 있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은 현대의 인간이 직면한 보다 날카로운 갈등 가운데 일부를 사실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매클루언에 따르면 이 책은 "구전적이고 직관적인 동양 문화가 합리적이고 시각적인 유럽식 경험 패턴들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극화해 고찰한 것"이었다. (799)

아직 읽어보지 않은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에 대한 설명이다. 읽고 난 뒤에야 설명이 이해가 되겠다. 

(출처: 정약용도서관)

토마스 만의 작품 가운데 상당수는 예술가 본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우리 시대의 어느 누구도, 그리고 어느 시대의 다른 누구도 예술가의 인성을 그만큼 깊이 탐색하거나, 또는 예술적 천재의 작품을 그토록 명료하게 서술한 적은 없었다. 가령 <토티오 크뢰거>나 <베네치아의 죽음> 같은 소설은 보편적인 동시에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다. (803)

토마스 만은 이 이야기가 그 당시에 이탈리아를 휩쓸고 여러 독일인까지 감염시킨 파시즘에 관한 은유였다고 시인했다. 다른 위대한 단편소설과 마찬가지로 <마리오와 마술사>는 그 소재의 출처보다도 훨씬 더 우뚝 솟아올랐다. (805)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동작이 거의 없다. 더군다나 주인공인 에스트라공이나 블라디미르, 또는 이 연극의 두 막 동안 주인공 곁을 지나가는 포조와 럭키가 하는 말 중에는 중요하거나 기억할 만한 내용이 전혀 없다. 디디와 고고는 고도를 기다리지만, 그는 오지 않는다. (806)

이 문장을 보며 이전에 읽었던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린다. 

https://bandiburi-life.tistory.com/827

 

[278]고도를 기다리며_자유와 평화를 위한 기다림의 책

매월 있는 회사 강의에서 도입부에 라는 책에서 인용된 부분이 나왔습니다. 란 책이 뭘까? '고도'란 것이 높은 곳인가? 외로운 섬? 사람 이름인가? 궁금했습니다. 뭐길래 막연한 이상향처럼 제목

bandiburi-life.tistory.com

 

놀라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지식에 관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미디어 때문에' 과연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비해서 오늘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설령 우리가 더 많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혹시 하찮은 지식의 증가가 아닐까? 설령 하찮은 것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미디어 때문에' 우리는 과연 진정으로 뭔가를 아는 것일까? (814)

현재는 미디어라는 말보다는 유튜브나 틱톡 혹은 넷플릭스와 같은 것들이 우리의 시간을 점유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의 질문은 '스마트폰 때문에'로 말을 바꿔야겠다. 스마트폰을 통해 우리는 더 많은 지식을 얻고 있는가. 아닐 것 같다. 많은 시간을 지식을 통해 지적 해방을 향하는 것이 아닌 시간을 소비하기 위한 '소일'에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우리의 일상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이런 편리 속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피곤해지는 것은 아닌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제15장 다음 100년

이데오노미의 창안자는 패트릭 건켈이라는 주목할 만한 인물로, 그는 텍사스 주 오스틴에 살면서 하루 종일 생각과 사물에 관한 자신의 목록을 만들고, 확장하고, 정련하는 데에 힘썼다. 각각의 목록을 오르가논(organon)이라고 불렀는데 (...) (844)

현재는 거의 잊힌 용어 '이데오노미'와 '오르가논'이란 말이 있어 인용했다. 언제 다시 부활하려나....

저자소개

글쓰기의 가장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매우 사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생각하며 앉아 있으면 되고 사람들의 질문에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바로 찰스 밴 도렌인가요?' 그러면 난 이렇게 생각한다. '음, 제 이름은 그렇습니다만,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또는 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트웬티 원>에서 속임수를 썼던 사람은 여전히 나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898)

저자 찰스 밴 도렌에게 <트웬티 원>에서의 속임수로 거의 평생 동안 주홍글씨가 되었다. 그는 글쓰기를 하며 이제는 그때의 자신은 '나의 일부분'이라며 말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옮긴이의 말

흔히 말하는 지식에는 특수한 지식과 보편적 지식이 있다. 특수한 지식이 일시적으로 유효한 지식이라면, 보편적 지식은 비교적 장시간(어쩌면 영구적으로) 유효한 지식이라 하겠다. 이 가운데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인간 경험의 총체"로 정의되는 후자, 즉 보편적 지식의 발전 과정이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다. (899)

저자는 보편적 지식이 고대 그리스에서 학문의 형태로 체계화되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지식 형성의 커다란 흐름이 중세와 르네상스와 근대를 거쳐 현대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900)

이 책은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 누적된 인간의 보편적 지식의 발전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정리 해 주었다. 

거듭 말하지만 지식은 결코 완벽할 수가 없다. 따라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도 지식을 사용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지식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이 책이 역설하는 중대한 사실은 바로 지식의 가변성이다. 항상 바뀔 가능성, 틀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만큼,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올바른 지식이 끼친 이득이 컸던 만큼, 잘못된 지식이 끼친 해악은 또 얼마나 컸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903)

지식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태도가 습득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또한 지식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교양이 영어로 liberal arts라고 하며 liberal이라는 말이 '자유롭게 한다'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지식이 교양이 되어 우리를 무지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를 늘 바란다. 이 책도 그 과정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독서습관 884_지식의 역사_찰스 밴 도렌_2010_갈라파고스(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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