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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884]지식의 역사 ②_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by bandiburi 2024. 5. 5.

(출처: peakpx.com)

<지식의 역사>를 읽으며 특별히 흐뭇하게 느꼈던 장면들이 있다. 2018년부터 독서를 습관화하며 다양한 책을 읽었다. 800권이 넘는 책을 읽고 정리하며 기존에 몰랐던 인물들과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지식의 역사>에서도 아주 많은 인물들이 언급된다. 그중에는 독서를 통해 만났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런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어 쉽게 이해된다. 이것이 독서의 힘이다. 

2부도 1부와 동일하게 책에서 남기고 싶은 부분을 인용하고, 소감을 함께 포스팅한다.


 제5장 중세 시대: 거대한 실험

그들의 삶은 갖가지 위험으로 가득했다. 작고 자급자족하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다 보니 강력한 중앙 권력이나 경찰 같은 것이 없었으므로, 항상 도적이나 떠돌이 범죄자의 공격을 받기 일쑤였다. 무법자의 공격이야말로 그 시대의 가장 큰 사회적 질병이었으며, 아마도 중세 사람들의 가장 큰 사망 원인이었을 것이다. (242)

로마 시민권이 자부심이던 안정된 사회가 사라졌다. 자급자족의 공동체에서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사회로 전락했다.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국민들에게 각자도생을 부추긴다면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로마 후기의 암흑시대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800년 이후로 제국과 교황의 권력은 종종 상대적 등락을 반복했다. 어떤 때에는 교황이 사실상 지상권을 지닌 것처럼 여겨졌다. 또 어떤 때에는 교황이 자신의 권력 가운데 상당 부분을 팔아치워야 했기 때문에, 황제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257)

교황과 황제 간에 갈등이 지속되었던 중세를 잘 보여준다. 무엇을 위한 권력 다툼이었을까. 결국은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일 것이다. 

13세기에는 십자군이 네 번이나 더 일어났다. 제8차이며 마지막이었던 십자군은 프랑스의 루이 7세(성 루이)가 이끌었는데, 이들의 운명은 어떤 면에서 어린이 십자군보다도 훨씬 더 딱하고 서글픈 것이 아닐 수 없었다. 1270년에 루이 왕이 소집한 십자군은 높은 기대 속에 출발했지만, 그해 7월 튀니스에 상륙한 이 거대한 군대는 전염병으로 인해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루이 왕은 맨 처음에 희생된 이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의 시신을 프랑스로 운구하게 됨으로써 더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265~266)

십자군이란 용어 자체가 중세 시대 유럽인들의 삶을 잘 표현한다고 본다. 현재는 전후 역사를 조망하고, 지리적인 이해도 있어  '십자군 전쟁' 자체가 얼마나 허망했는지 안다.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기에 '어린이 십자군'이라는 말까지 나와야 했나. 결국은 잘못된 왕의 선택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전염병에 오염된 왕의 시신은 프랑스에서 전염병으로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보이티우스는 A.D. 480년에 로마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좋은 교육을 받았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모두에 능통했던 것 같다. 510년에 그는 일생의 과업을 시작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김으로써 미래 세대에게 최고의 고전을 알리는 일이었다. (...) 그는 520년 이후에 왕의 미움을 받았고, 마침내 투옥되어 끔찍한 고문을 받고 524년에 처형되었다. 감옥에 있을 때 그는 유명한 저서 <철학의 위안>을 썼다. (271)

보이티우스(혹은 보에티우스)는 그리스 고전을 알리는 과업을 수행했지만 서로마제국의 게르만 황제의 미움을 받아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책 <철학의 위안>을 읽고 포스팅한 내용을 연결한다. 

https://bandiburi-life.tistory.com/1980

 

[753]철학의 위안_보에티우스가 신 안에서 위안 받으라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메시지

은 제목은 건조해 보이지만 저자 보에티우스의 삶을 이해하고 읽는다면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보에티우스는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인 오도아케르에게 멸망당한 476년 즈음에

bandiburi-life.tistory.com

 

이븐시나는 두 편의 매우 방대한 저술을 비롯해 그보다 더 짧은 저술도 상당수 남겼다. (...) <치유의 책>(...) <의학 정전> (...) 두 편의 저술 모두 훗날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양의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로써 스콜라 철학자들은 성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느님의 도시>, 보이티우스가 번역한 <오르가논>을 해석하고 재해석하는 것 말고도 이 세상에 훨씬 더 많은 지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275)

페르시아의 철학자이자 의학자인 이븐 시나는 그리스와 아랍의 학문을 정리해서 책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의 책은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큰 양향을 주었다는 내용이다. 역시 기록이 중요하다. 

후세의 눈에 아벨라르는 종종 순교자로 간주되었다. 거세와 단죄와 침묵형과 (1142년에 이르러) 마침내 찾아온 죽음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와중에 그는 서양의 정신을 계속 살아 있게 만드는 한편, 이성의 승리로 가는 길을 닦아놓았다. (278)

우리의 현대 세계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고를 잊어버린 채, 하느님의 도시를 완전히 저버리고, 영적 세계의 폐허 위에 새로운 인간의 도시를 건립했다.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할 것이었다. 그것은 자연의 진리가 될 것이며, 신앙은 거기로부터 멀어져 유배를 떠날 것이었다. (294)

아우구스티누스가 언급한 하느님의 도시와 인간의 도시에 대한 내용이다. 현대의 세계는 하느님의 통치와 주권이 지배하는 하느님의 도시는 폐허로 사라지고 땅의 도시 즉 인간의 도시를 세우고 있다는 경고다. 

 

제6장 르네상스에서는 무엇이 다시 태어났나?

로마인, 그리고 보다 이전의 그리스인 역시 세상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젊음과 멋진 외양, 건강과 돈을 좋아했던 것이다. 중세 시대는 초점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바 있었다. 이제 그 초점은 다시 과거의 주된 관심사로 돌아온 셈이 되었다. 르네상스는 여러 가지의 재탄생이기도 했지만, 그 한가운데에는 바로 이런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308)

종교와 신 중심의 세계에서 다시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왔다. 바로 르네상스다. 과거의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관심이 회복되었다. 

고전의 재탄생을 가져오기 위해,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는 우선 자신들이 고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전 라틴어를 이해하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문제는 읽을 만한 텍스트를 찾아내는 일이었으니, 그중 상당수는 이미 풍문으로만 전해지고 있었다. (...) 두 사람은 유럽 남부를 여행하면서 여러 기록 보관소를 찾아서 고서를 뒤졌다. 이런 방식으로 해서 페트라르카는 키케로의 편지를 상당수 발견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영영 유실되고 만 것으로 여겨지던 작품들이었다. (312)

고전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르네상스가 단순히 문예부흥이라고 언급되지만 학자들의 구체적인 활동을 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오류가 있게 마련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베이컨의 "우상"에 관한 주장은 그 자체로 매우 교훈적이다. 만약 우상숭배로 인해 길을 잘못 들어서지만 않는다면, 인간은 일반적인 경우보다도 훨씬 더 많은 진리를 획득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네 가지 서로 다른 우상을 구분했는데, 그 모두는 그의 시대에나 우리의 시대에나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328~329)

여기에 소개된 네 개의 우상은 인간이 빠지기 쉬운 속성을 담고 있다. 역으로 이런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고 진리를 얻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베이컨은 오늘날의 심리학이라 부르는 학문의 선구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심리를 잘 이해했다. 

  • 종족의 우상: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여러 가지 지적 결함을 말한다. (...) 이는 가장 최신의 이론이 가장 진실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 동굴의 우상: 개인적 특이성에 의해 발생하는 오류다. (...) 그런 사고 습관은 진리의 탐구 과정에서 많은 수의 사람들을 한데 모음으로써 각자의 특이성이 상쇄되도록 하는 방식으로만 대항할 수 있다. 
  • 시장의 우상: 언어 그 자체로 인해 야기되는 오류다. (...) 모든 사람들은 언어를 조금씩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으므로, 결국 지식에서의 왜곡과 결함은 그야말로 근절할 수 없는 것이다. 
  • 극장의 우상: 진리를 위한 인내심 있고 겸손한 탐구의 길을 가로막는 철학적 체계를 말한다. 20세기에는 서로 다른 정치사상 체계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자와 민주주의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말이야 이해 가능했을지 몰라도, 그 뒤에 있는 생각들은 그 의미를 가리고 있었던 셈이다. 

(...) 이런 기술, 또는 기예를 "교양"(liberal, 자유로운)이라고 일컬은 까닭은 그것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기(liberating) 때문이었다. 즉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을 옭아매는 무지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때문이었다. (330)

대학에서 전공과목과 교양과목을 배운다. 전공에 비해 교양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 문장으로 보면 교양이 더욱 폭넓게 우리의 삶에 자유로움을 줄 수 있는 학문이다. 전공이란 교양의 일부분이다. 독서는 교양을 얻는 좋은 방법이다. 결국은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다. 지식의 선순환이다. 

 

비잔티움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된 1453년 이후에 그러했으니, 이 사건으로 인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이탈리아로 건너왔던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고전 그리스어를 읽는 능력뿐만 아니라, 실제로 고전 작품의 필사본도 무척 많이 가지고 왔다. (332)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된 역사적 배경이다. 결국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며 그곳에 있던 피난민들이 근처에 있는 이탈리아로 이주하며 르네상스의 씨앗이 뿌려졌다. 

인쇄가 발명된 지 불과 반세기 동안인 1450년부터 1500년까지 인쇄본 가운데 대다수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필사본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그리스어와 라틴어 저술의 번역서였다. (...) 1500년 이후로는 각국의 언어 -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에스파냐어, 독일어 등 - 로 간행된 작품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333)

인쇄술의 발명으로 초기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인쇄본이 전해졌다. 16세기에는 각 나라의 언어로 된 인쇄본이 전해지며 종교와 사상이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구두로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게 전해 들었던 내용을 직접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변화의 시작이었다. 

<수상록>보다도 1000년 전에 <고백록>을 쓴 성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이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는 연신 독자에게 교훈을 가르치려 들었다. (...) 하지만 몽테뉴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에 관해서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누구인지에 더 관심을 가졌고, 이것은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336)

르네상스는 그 모든 표현에서 인간을 사물의 중심에 놓아두었다. (...) 최소한 몽테뉴는 자기 자신은 대변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상처 받는지, 무엇에 놀라고 즐거워하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의 무엇이 자신에게는 공허하고 어리석게 느껴지는지에 관해 말할 수 있었다. (337)

몽테뉴 이전에는 교훈을 주기 위한 책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있다. 몽테뉴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수상록>에 적었다.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세상사도 연극과 다를 바 없어. 세상사에서도 어떤 사람은 황제 역할을 하고, 다른 사람은 교황을 하잖나. 연극 하나에 나올 수 있는 모든 인물상이 있지. 그러나 종말에 가면, 생명이 끝나는 순간에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죽음이 와서 그 사람들을 구분하던 의상을 벗기고 무덤 속에 똑같이 눕게 하지."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중 (347)

돈키호테가 산초에서 '인간의 삶을 연극으로 멋지게 비유'한 문장이다. 공수래 공수거란 말이 떠오른다. 

1347년 초에 크림 반도에 있는 제노바의 한 무역소가 헝가리에서 온 킵차크인과 동양 몇몇 나라에서 온 몽골인을 포함한 군대에게 공성을 당한 적이 있었다. 이 가운데 몽골인들은 새로운 형태의 전염병을 가져왔는데, 공성 도중에 진영에서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병사가 죽었다. (...) 제노바인들은 전혀 면역이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그 정착지의 거주민 가운데 상당수가 사망했다. 그들의 배 가운데 한 척이 봉쇄망을 뚫고 (...) 시칠리아에 있는 메시나에 도착한 것은 1347년 여름의 일이었다. 이 배는 겁에 질린 피난민들과 황금, 그리고 전염병을 가져왔다. (351)

1347년 유럽에 전염병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문장이다. 앞에서 언급한 13세기 십자군 전쟁 말기에 프랑스 루이 7세가 전염병에 사망하고 그의 시체가 프랑스로 전해지며 전염병도 함께 옮겨진 부분과 유사하다. 

이처럼 여러 가지 사건들 - 천 종이의 이용이 새로이 가능해진 것, 이동식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의 발명, 간행을 원하는 탁월한 원고가 갑자기 상당수 나타난 것 - 이 놀라우리만치 동시에 발생함으로써 르네상스가 전파되었다. (358)

영국으로 간 에라스뮈스는 친구인 토머스 모어를 통해 입수한 여러 수도원의 필사본들을 취합함으로써 가능한 한 최고의 텍스트를 만드는 작업에 돌입했다. 대륙으로 돌아온 그는 라틴어 번역에 착수했다. 1516년에 주석과 아울러 더욱 향상된 그리스어 텍스트를 병기한 에리사뮈스의 라틴어 번역 <신약성서>가 출간되었다. (366)

에라스뮈스가 토머스 모어의 도움을 받아 라틴어 번역 <신약성서>를 만드는 과정이 소개된다. 르네상스는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각자의 관심분야에서 과거의 필사본을 연구하고 번역하며 응축된 힘으로 작용했다. 

 

1518년 이래로 토머스 모어는 오로지 왕을 섬기는 일에만 전념했으며, 1529년에는 울시 추기경의 몰락으로 인해 대법관의 지위까지 올랐다. (...) 그의 치세는 짧게 끝나고 말았다. 왜냐하면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한 행위를 그로선 양심상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황 역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헨리를 파문했으며, 이에 헨리는 교황과 의절하고 스스로를 영국국교회의 수장으로 선언했다. (...) 왕은 참수형으로 감형해 주었다. 모어는 1535년 7월 6일에 사망했다. (370)

토마스 모어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보여준다. 헨리 8세가 영국국교회를 만들면서까지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했다. 토머스 모어는 양심상 이런 헨리 8세의 행위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그의 미움을 사서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유토피아>로만 알고 있던 토마스 모어의 삶이 이렇게 헨리 8세와 연결되어 있었다. 

크롬웰이 새로 기초한 새로운 법률하에서 헨리는 영국국교회의 수장으로 선포되었다. 헨리의 이름으로 크롬웰이 영국을 다스린 8년 동안, 영국의 종교개혁은 신혹히 진행되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크롬웰은 전국에 있는 수도원을 거의 모두 해산시켰으며, 그 막대한 부를 왕에게 귀속시켰다. 그리하여 왕의 부는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373)

교황과 결별하고 영국국교회를 선포하며 헨리 8세는 종교적인 수장이 되면서 함께 수도원의 재산도 귀속시킬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대 영국 왕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이고, 유럽의 군주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당시에, 즉 곳곳에서 이른바 신정정치 국가와 그것을 대체하게 될 새로운 민족국가에 관한 새로운 관념을 르네상스가 인간에게 제공해 주었던 그 시절에 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완벽하게 상징했기 때문이다. (374)

헨리 8세가 영국국교회의 수장이 된 행위는 앤 불린과의 결혼을 위한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신정정치를 벗어나 민족국가로 가는 문을 열었다는 큰 의미가 있었다. 

마침내 그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어의가 믿음의 선물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따라서 인간은 믿음에 의해, 오로지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고 믿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의 방대한 기반 시설은 필요성이 덜하게 되었고, 그는 사실 이것을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도로라기보다는 오히려 장애물로 보았다. (376)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시작이다. 사람의 믿음이 물리적인 교회 시설보다 중요하다는 깨달음의 전파다. 현재 대한민국에도 부분적인 종교개혁이 필요하다. 시설뿐만 아니라 사람을 속이려는 미혹의 집단에 대한 개혁도 필요하다. 

종교개혁은 그 자체로 목표이며, 또한 다른 목적을 위한 이유이기도 했다. 헨리 8세는 교계의 개혁을 원한다고 천명했지만, 사실은 이혼과 아울러 영국 전역의 가톨릭 수도원에 저장된 부를 원했을 뿐이다. 루터를 지원한 독일의 여러 군주(제후)들 역시 개혁을 열망하기는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로마로부터의 독립과 아울러 자신들의 영토에서 교회 기구가 거두는 세금 가운데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세속 권력도 함께 작용하고 있었다. (378)

과거와 현재가 동일한 점이 있다. 인간의 탐욕이다. 종교를 내세우며 물질적인 부를 축적하려는 욕심이다. 명분과 실리의 추구는 현대의 정치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민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종교와 정치는 제 역할을 한다. 부패한 종교와 정치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것처럼 사회를 후퇴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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