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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884]지식의 역사 ③_유럽의 대외 진출과 과학적 방법의 발견 및 혁명의 시대

by bandiburi 2024. 5. 5.

(출처: worldhistory.org)

<지식의 역사> 세 번째 포스팅이다. 유럽이 항로를 개척하며 해외로 진출하는 부분, 자연 세계를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부분, 마지막으로 각국에서 혁명으로 통해 인민들에게 통치권이 이양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전과 동일하게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을 인용하고 소감과 함께 포스팅한다.


제7장 유럽의 대외 진출

1405년에 티무르가 사망하고, 그로부터 한 세대 뒤에는 원정 함대가 없어짐으로써,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는 다시 한번 장막이 드리웠다. 양쪽 간의 여행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쿠빌라이 칸은 오로지 소수의 베네치아인들만이 믿는 낭만적인 전설로 남아 있었다. (395)

동양과 서양간의 교역이 중단되었다. 중국 원나라 시대에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기록된 것처럼 쿠빌라이 칸 시대에 왕래가 있었다. 명나라에서도 정화의 원정이 있었지만 이마저도 중단되었다. 

(...) 가는 곳마다 놀랍고도 기이한 것 투성이었고, 금과 은을 거의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었다. 훗날 유럽으로 전해진 담배와 면화도 바로 그곳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 두 가지 물건이야말로 구세계의 생활 방식에 금보다도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쳤다. (404)

유럽이 중남미 항로를 개척하면서 그곳에서 귀금속을 얻고, 새로운 농산물도 발견한다. 담배와 면화는 실생활에서 유럽인들의 생활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하지만 이런 플랜테이션에서는 항상 노동력이 부족했다. 일은 고되어 사람을 녹초로 만들었다. 가뜩이나 드물었던 토착민의 인구는 유럽인의 맹공으로 인해 더욱 줄어들었으니, 이는 단순히 잔혹한 무기 때문만이 아니라 토착민이 아직 면역성을 지니지 못했던 낯선 질병 때문이기도 했다. 해결책은 아프리카인을 이용한 노예제였다. (409)

아프리카인들이 왜 노예가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문장이다. 중남미에서 설탕을 얻기 위한 플랜테이션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토착민들은 유럽인들이 옮긴 질병으로 줄어들고 농장의 확대는 더 많은 노동력을 요구했다. 결국 아프리카인들에게 눈을 돌린 것이다. 

 

제8장 과학적 방법의 발견

그는 소심한 까닭에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선뜻 간행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미루고 또 미루었다. 그러다가 사실상 임종을 맞이해서야 원고를 인쇄업자에게 넘기도록 허락했다. 그 위대한 저술의 완성본이 도착한 것은 1543년, 그가 사망한 바로 당일의 일이었다. 그는 종교적 논쟁을 두려워했고, 정통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자신의 생각에 관해 뭐라고 말할지를 두려워했다. (...) 새로운 이론은 코페르니쿠스가 비록 생전에 제시하기를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바랐음 직한 지적 혁명을 산출하지는 못했다. (445~446)

16세기에도 여전히 종교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관찰을 통한 연구 결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았지만 임종할 때까지 간행을 미룰 정도였다. 과학이 종교의 굴레를 벗어나길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 다른 아이러니는 르네 데카르트의 생애를 더욱 찬란하게 빛내준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지녔지만, 그의 저술은 다른 누구의 말보다도 더 크게 교회의 권위를 잠식했다. 그는 과학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자체에 혁명을 가져온 과학적 방법론을 창안했다. 하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견해는 종종 틀렸고, 어떤 경우에는 애초에 워낙 잘못 고안된 나머지 프랑스의 과학 발전을 무려 2세기나 막아서는 결과를 가져왔다. (460~461)

데카르트는 코페르니쿠스와는 달리 종교의 권위를 손상시키지만 자신의 생각을 발표했다. 

어떻게 해서 자신이 배운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의심하게 되었으며, 오로지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의심될 수 있다는 간단한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말이다. 그 한 가지는 바로 본인, 즉 의심하는 사람이 그렇게 의심하는 '까닭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462)

데카르트 이전까지만 해도 신학은 모든 학문의 여왕이었고, 수리 물리학은 그 가난한 친척에 불과했다. 하지만 데카르트 이후에는 그 위계질서가 사실상 뒤바뀌었다. (465)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유명한 명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발표했다. 의심하는 사람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신학에서 데카르트의 과학정 방법론은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길버트 더하기 갈릴레오 더하기 케플러 더하기 데카르트가 바로 뉴턴역학이었다. 새로운 일련의 운동 법칙이 그 과정의 첫 번째 단계였다. 그 법칙들은 뉴턴의 위대한 저서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 (보통, "뉴턴의 <프린키피아(원리)>"로 통칭한다)의 서두에서 극도로 단순하게 서술된다. 그 법칙들은 우주를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전적으로 다르게 규정했다. (467)

뉴턴이 정립한 자연에 대한 수학적 해석은 현재까지도 과학의 영역에서 유효하다. 뉴턴은 길버트, 갈릴레오, 케플러, 데카르트의 이론을 정리해서 <프린키피아>에 서술했다. 특히 뉴턴의 미적분은 뛰어난 자연을 환원시켜 해석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제9장 혁명의 시대

하지만 인간은 공장이 낳은 특화된 노동이 인간을 오로지 기계의 부속인 양 간주함으로써(농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게 되리라는 것까지는 미처 몰랐던 셈이다. (487)

생산성을 극대화 하는 새로운 공장형 생산 시스템은 인간의 역할을 한정된 구간으로 제한했다. 인간의 노동은 기계의 부속품과 같이 간주되었다. 인간은 영혼 없는 기계 부품이 되었다. 이는 인간 영혼의 파괴로 이어졌다. 

법이 침해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해가 미치게 된다면, 법이 그 마지막 숨결을 거두게 되는 경우에는 언제나 전제가 시작된다.  - 존 로크 & 존 스튜어트 밀의 <통치론/자유론> 中 (497)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는 헌법 제1조 1항이다. 이런 법이 지켜지지 않고 특정 국민이 국민을 대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이 허용되면 전제정치가 시작된다는 내용이다. 특정인이 국가의 권력을 제한 없이 마음대로 휘두르는 상태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는 삼권분립을 바탕으로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되어 있다. 2024년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의 정신이 더 반듯하게 세워지길 바란다. 

1688년의 명예혁명은 영국인의 사회를 해체시키지는 않았으며, 실상 영국인 대부분은 그 혁명 이전이나 이후에나 상당 부분 똑같았다. 하지만 변화는 많은 사람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이 나아갔다. 이제는 단순히 군주의 이름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군주와 그 인민의 관계 역시 찰스 2세나 제임스 2세 시대와는 달랐으며, 또한 찰스 1세나 제임스 1세나 엘리자베스 시대와는 더더욱 달랐다. 그때 이후로 의회는 잉글랜드의 지배자가 되었다. 왕이 어떤 상태를 열망했든 지 간에, 그리고 왕이 일시적으로나마 어떤 권력을 소유했든지 간에, 이런 전통은 줄곧 계속되었다. (...) 따라서 "88년"의 혁명은 진정한 혁명이었던 셈이다. (500)

영국이 1688년을 기점으로 군주의 권한이 의회로 이전되었다. 왕은 있지만 실질적인 국가의 권한을 의회에 두는 진정한 혁명이었다. 프랑스혁명과 같은 커다란 진통이 없이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해 보이는 것 없이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여기서는 단지 통치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에서의 진정한 변화도 있었다. 여기서 마침내 인민은 통치를 제 손아귀에 쥐었으며, 이제는 - 그리 인한 당연한 권리로서 - 법률과 입법자의 선과 악을 이후 모든 시대에 걸쳐 판정하게 되었다. 여기서 마침내 통치가, 즉 그 어떤 정치 철학자에 의해서도 그 합법성이 부인될 수 없는 통치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마침내 새로운 세계가, 즉 인간이 모두 평등한, 그리고 필연적으로 과거보다는 훨씬 더 밝은 미래를 향한 희망과 에너지에 사로잡힌 새로운 세계가 생겨난 것이다. (517)

인민들에게 통치권이 주어지는 혁명, 이 때에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에너지가 넘치는 세계로 갈 수 있다. 

 

알렉시 드 토크빌(1805~1859)은 1835년에 미국의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위업에 관한 글을 썼는데, 거기서 그는 평등을 향한 진보가 저항 불가능하다고 역전 불가능한 움직임이며, 그 어떤 왕이나 황제보다도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명료하게 직시했다. (521)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평등을 향한 여정은 강력하고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깨달았다. 

토머스 제퍼슨은 <권리장전>의 기초에도 일조했으며, 사실상 미국의 정치 생활에서 거의 모든 혁신적인 것마다 일조했다. 초창기 미국 정부의 여러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이신론자였다. 그는 하느님을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한 가지 종교를 믿지는 않았다. 이신론자들은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어디까지나 각자가 결정하기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525~526)

'이신론자'라는 용어에 집중한다. 종교적으로 하느님을 믿되, 행하는 방법은 개인에게 달렸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현대인들의 종교생활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모차르트 역시 그중 하나였으니, 오페라 <돈 조반니>는 종교적 불평등에 대한 격렬하면서도 기발한 공격이었다. 또한 이것은 지식을 유일무이한 종교로 삼은 한 인간의 비극이기도 했다. (526~527)

  • 원래는 에스파냐에서 시작된 '돈 후안'의 이야기가 이후 유럽 각국에서 공유되면서 나라마다 그를 가리키는 호칭이 약간씩 달라졌다. '돈 조반니'(Don Giovanni)는 그 이탈리아식 변형이다. (527)

만약 모차르트가 구상한 돈 조반니의 삶과 죽음이 비극적이라면,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비극이며, 고대 그리스나 셰익스피어의 희곡과는 매우 다른 비국일 것이다. 돈 조반니는 조소적이고 냉소적이며,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통적 가치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그의 비극은 - 만약 이것이 정말 비극이라고 치면 - 자신이 비웃어 마지않는 사회로부터 그가 완전히 소외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531)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이것이 에스파냐의 '돈 후안'의 이야기와 유사하고, 당시의 종교적 불평등에 대한 공격이라고 한다. 전통적 가치를 무시하는 두려움이 없는 돈 조반니는 역으로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이는 그의 비극이다. 오페라를 보고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더 와닿을 문장이다. 

https://bandiburi-life.tistory.com/2329

 

[884]지식의 역사 ④_19세기 근대의 서곡 및 1914년의 세계

네 번째 포스팅이다. 19세기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1914년의 세계를 보여준다. 책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에 소감을 함께 포스팅한다.제10장 19세기: 근대의 서곡따라서 소농들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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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884_지식의 역사_찰스 밴 도렌_2010_갈라파고스(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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