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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습관

[884]지식의 역사 ①_고대부터 그리스 로마 시대

by bandiburi 2024. 5. 3.

정약용도서관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해 책 <지식의 역사>를 받았다. 보통 책의 세 배 이상의 부피를 가진 900페이지의 도서다. 뒤로 미루다 5월 초 연휴를 맞아 작정하고 읽었다. 

완독하고 나니 제목이 내용을 잘 설명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지식이라고 간주되는 역사, 철학, 과학, 예술, 문학에 대해 시계열적으로 정리했다. 5천 년의 역사 속에서 알면 좋겠다 싶은 내용을 900페이지로 압축해서 정리했다. 

저자 찰스 밴 도렌은 두 가지 측면에서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첫째는 지식인을 많이 배출한 도렌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어려서부터 학구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영문학 강사로 활동했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집자로도 활동했다. 둘째는 <트웬티 원>이란 퀴즈 쇼 프로그램 스캔들의 당사자로 평생을 그 오명 속에 살았다는 점이다. 책의 말미에 '저자 소개' 부분에 조금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여러 분야의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상호 관계를 이해하며 습득할 수 있는 장점을 제공하는 책이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 발견과 발명 그리고 예술 작품들을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특정 분야만 집중해서 볼 때는 보이지 않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책의 내용이 방대해서 다섯 번에 나눠서 포스팅한다. 각 장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을 인용하며 소감을 남겼다. 


제1장 고대인의 지혜

그렇다면 왜 그런 다수가 그렇게 특권을 박탈당한 채로 계속 남아 있었던 것일까? 물론 꼭대기에 있던 소수가 힘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결코 힘만의 문제가 되진 않았다. 사회적으로 분화된 체계는 일부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모든 사람이 믿는 것 위에 세워져야만 한다. 카스트 제도에 대한 보편적인 수용이 결국 그 지속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47)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카르마를 수용하며 살아간다. 대한민국에서는 그 반대다. 어찌 되었든 더 나은 삶을 지향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쟁과 비교가 심하다. 

역사상의 모든 폭군들은 가장 실용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지식을 국민들에게 금지했다. 지식을 보유한 민중은 항상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게 마련이었으며, 그 두 가지로 말하자면 폭군들로선 결코 주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51~52)

올바른 지식을 보유한 민중은 자유와 정의를 추구한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지식인의 외양을 가졌지만 거짓된 선동을 일삼는 자들은 사기꾼에 가깝다. 

읽고 쓰기를 아는 것이야말로 수메르인이나 아카드인이나 바빌로니아인이나 아시리아인 사이에서는 부와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심지어 오늘날도 문자 사용 능력은 종종 출세를 위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남아 있다. (54)

고대 시대에 읽고 쓸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부와 권력에 가까이 갈 수 있었고, 이런 현상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대학에 진학하고, 전문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노력은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대한민국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에스파냐인 침략자들의 눈에는 생소한 갖가지 곡식과 채소와 과일을 길렀다. 오늘날 전 세계의 식량 가운데 60퍼센트가량이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멕시코와 페루에서 경작되던 농작물의 후손들이다. (55)

우리에게 익숙한 농작물들의 상당수가 멕시코와 페루에서 재배되던 작물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옥수수, 감자, 커피, 설탕 등으로 이런 작물이 없던 시대에 한반도 거주자들을 무엇을 먹었던 거지라는 의문이 든다. 

잉카인은 글쓰기와 방법도 고안하지 못했다. 여러 세기 동안이나 중앙아케리카의 다른 문명들과 겨우 수백 마일밖에 안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잉카인은 그 이웃 문명에 관해서나 그들의 업적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처럼 여러 가지에 대한 잉카인의 무지는 또 다른 여러 가지에 대한 그들의 지식만큼이나 놀랄 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56~57)

잉카 문명이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들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남겼을 거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고도의 문명을 세웠지만 글로 남긴 것이 없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극히 일부만이 전해진다. 글은 문명과 지식의 전수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면 유대인은 인간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인간 스스로에게 있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즉 그걸 빌미로 신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81)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대를 넘어 유대인들은 인간 스스로의 결정과 책임을 주장했다는 것을 놀라운 발전이다. 

그리스인의 경우에는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완벽한 알파벳을 갖게 되자마자, 글쓰기야말로 뛰어난 생각의 도구라는 사실을 이해한 최초의 사람들이 되었다. 그때 이후로 우리가 알고 또 살아가는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한 셈이다. (86)

그리스 문명과 잉카 문명이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리스인들은 문자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자신들의 생각을 남겼다. 

A.D. 1200년경, 또는 그보다도 수백 년 앞서서, 힌두인이 자신들의 십진법 체계에서 '0'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종종 '0'의 발견자들로 언급된다. 하지만 힌두인도 그리스인에게서 그 기호를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십진법에서 자릿값 기수법과 '0'의 일관된 사용의 조합이야말로 중대한 계산의 난점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 방법인 것으로 증명되었고, 그때 이후로 세계 전체가 그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89~90)

'0'을 최초로 사용한 게 인도에서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인도도 그리스에서 그 기호를 배웠을 수 있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0'은 숫자를 표현함에 있어 상당한 기여를 했다. 

 

제2장 고대 그리스의 지식 폭발

그리스인은 이러한 인간의 오만을 지칭하는 특별한 단어를 갖고 있었다. 바로 '후브리스(hubris)'다. 이들은 후브리스를 죄로 여겼으며, 따라서 이러한 죄를 범한 자를 처벌하는 여신 네메시스를 숭상했다. (94~95)

하지만 독창적인 생각, 그러니까 현실 세계에 관해서 우리가 수학적인 방식으로 - 어쩌면 오로지 수학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 이해 가능한 뭔가가 있다는 생각은 인류의 사상의 역사에서 커다란 진보 가운데 하나였다. (106)

이전에 없던 뭔가를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그리스 시대에 주변 세계를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는 발상 자체가 굉장한 진보다. 결국 그 생각은 현재의 과학문명으로 이어졌다. 

참으로 민망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인 남성 귀족들 - 본인과 경제 및 다른 이익을 공유했으며, 본인 역시 당연히 그중 하나로 여겨져야 마땅하다고 믿었던 - 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열등하다고 보았던 셈이다. 그의 유명한, 그리고 위대한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는 일련의 현란한 논리를 펼친 끝에 그야말로 결점이 뚜렷한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124~125)

나는 지금 아리스토텔레스를 호되게 비판하는 셈인데, 여기에는 이유기 없지 않다. 철학자 겸 최초의 과학자로서 그의 위대함이란 당연히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범한 오류는 오랫동안 유해한 효과를 끼쳐왔다. 태생적 열등함과 여성의 열등함에 관한 그의 교의는 오늘날까지도 각각 노예제와 양성 간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거나, 또는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 (...) (132)

아리스토텔레스도 시대적인 한계를 넘을 수 없었다. 국적에 대한 차별, 인종에 대한 차별, 성 차별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B.C. 332년 7월, 그는 섬에 위치한 도시 티레(티루스)로 진격해서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승리를 거둔다. 이후 수개월 동안 이집트를 정복했고, 이로써 그로부터 300년 뒤에 로마인이 이곳을 다시 정복할 때까지 이 나라는 그리스인이 다스리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클레오파트라도 사실은 이집트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이었다.) (137)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로마가 등장할 때까지 그리스인이 지배했다. 로마의 역사에 등장하는 클레오파트라도 지배 민족인 그리스인이었다.

헤로도토스는 B.C. 484년경에 태어나, 그리스의 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이지 귀가 닳도록 들으면서 자랐다. 그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여러 해에 걸쳐서 페르시아 제국 대부분과 이집트, 그리고 그리스의 도시 대부분을 직접 가서 보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이 관찰한 것이며, 저명한 인물들과 나눈 대화를 세심하게 기록한 듯하다. (144~145)

<역사>의 저자인 헤로도토스에 대한 이야기다. 많이 듣고, 여행을 하고, 관찰한 것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이 책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이 문장으로 알 수 있다. 

바로 이것, 즉 전쟁에 승리하는 대신 영혼을 잃어버린다는 것이야말로 아테네의 진정한 비극이었음을 투키디데스는 암시한 것이었다. (149)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를 지은 투키디데스가 아테네의 비극에 대해 암시한 내용이다. 신흥 강국이 부상하면 이를 견제하기 위한 기존의 강대국이 견제하며 전쟁이 발생한다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도 유명하다. 

 

제3장 로마인이 알았던 것

반대로 로마인은 시종일관, 그리고 천성적으로 실용적이었다. 이들의 실용성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천명되었다. 그들은 위대한 그리스 철학을 기꺼이 희석시켰다. 그 내용을 대중이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파이데이아' 즉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여러 인물들에 의해 개발된 고상하고도 복잡한 그리스의 교육체계를 수사학, 또는 웅변술의 과정으로 축소시켰다. (172)

그리스 철학과 교육체계를 로마인들은 실용성을 추구하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조정했다. 역사적 상황과 지리의 영향이 민족의 성향을 결정하고 외부에서 들어온 문화는 적절하게 응용된다. 

마침내 529년에 들어서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재위 527~565)가 유명한 법전을 반포했으니, 이것은 이후로 로마법의 주요 원천이자 권위로 남게 되었다. (175)

에피쿠로스는 행복이 지고의 선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의미한 행복이란 주로 고통의 회피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고통과 걱정과 불안 없는 삶이야말로 행복할 수밖에 없으며, 비로소 인간은 있는 그대로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정원'에서 생각하기에 고통의 회피는 곧 정치 생활의 회피를 의미했다. 에피쿠로스는 공직에서 행복을 느끼기는 무척이나 어려우므로, 누구든지 공직에서 완전히 은퇴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181)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행복'은 고통, 걱정, 불안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고등학교 시절 '쾌락'과 연결 지어 배웠기에 오해를 했었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 이런 상태일 것이다. 

루크레티우스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그리스 철학자로는 스토아주의자 제논(B.C. c.335~B.C. C.263)이 있는데, 생존 연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에피쿠로스와 동시대인이었다. 그는 스토아 포이킬레(Stoa Poikille), 즉 '채색된 주랑'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거기서 그의 철학을 가리키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182)

스토아 학파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문장이다. 

키케로의 단순한 삶의 규범은 일찍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국가>에서 제시한 제도화된 국가 교육의 웅대한 계획,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에서 제시한 바 있는 덕에 관한 탐구와 섬세한 분석, 이런 것들을 압축한 지극히 실용적인 로마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189)

키케로는 전형적인 로마인으로서 그리스 이론을 압축해서 실용적인 면을 추구했다. 

45세 때에는 클라우디우스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지만, 아그리피나는 세네카를 다시 로마로 불러들여 자기 아들, 즉 미래의 황제 네로의 스승으로 삼았다. (198)

세네카가 네로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그리피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타키투스의 <역사>는 네로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그보다 뒤늦게 저술한 <연대기>는 티베리우스의 치세로부터 네로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를 다루고 있다. (203)

현재의 독자들은 타키투스와 같은 기록자들의 혜택을 받아 로마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시오노 나나미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근저에는 과거의 기록들이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말한다. 정치적 자유의 행복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 반대의 경우는 순전한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으리라. (207)

2024년의 대한민국을 이 문장에 비춰본다. 국민들이 생각하는 대로 말할 수 있는 사회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시각으로 보자면 전체주의적인 모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제4장 암흑시대의 빛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은 단순히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채택한 것뿐만이 아니었으니, 그는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세우고, 다신교 사원에서 강탈한 부를 그곳에 투입함으로써 자기 제국의 본거지로 삼았다. 서쪽 제국은 여전히 라벤나에서 통치되었지만, 그 권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던 반면, 동쪽 제국은 점점 더 부유하고 인구가 늘어났다. (227)

로마의 역사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콘스탄티누스의 결정을 업적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종교가 로마에 위협이 되지 않으면 허용하는 포용적인 사회였던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며 더욱 쇠락의 길로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문장이다. 

기독교인 중 상당수가 로마와 제국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웠으니, 어쨌거나 그렇게 하는 데에는 분명한 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만인이 과거의 사회를 파괴한 다음, 오로지 힘에만 의거한 잔인하고도 원시적인 봉건제도를 수립하고 나자, 기독교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느님의 도시라는 유혹 쪽으로 더욱 눈을 돌리게 되었다. (233)

로마 말기에 실용성을 추구하는 정신이 사라지고 신 중심의 시대로 향하는 모습이다. 

로마인의 성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들의 해석에 따르자면 성공이란 오늘을 향해 달려 나가고, 내일은 저 혼자 알아서 하게 되버려 두는 것이었다. 이들은 오만하고, 탐욕스럽고, 허영심이 강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로마인은 오늘날의 우리와 상당히 닮았다. (235)

현재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여전히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 인스타그램에 부풀려진 자신을 보여주고 싶은 허영, 유명 브랜드를 보여주고 싶은 허영이 상존하는 시대다. 역사는 반복된다. 

https://bandiburi-life.tistory.com/2323

 

[884]지식의 역사 ②_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를 읽으며 특별히 흐뭇하게 느꼈던 장면들이 있다. 2018년부터 독서를 습관화하며 다양한 책을 읽었다. 800권이 넘는 책을 읽고 정리하며 기존에 몰랐던 인물들과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에서도

bandiburi-life.tistory.com


독서습관 884_지식의 역사_찰스 밴 도렌_2010_갈라파고스(240504)


■ 저자: 찰스 밴 도렌

미국의 저술가 겸 출판 편집자. 유명한 저술가와 지식인을 여럿 배출해 명성을 얻은 밴 도렌 가문에서 1926년 태어났다. 아버지 마크 밴 도렌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자 컬럼비아 대학 교수였고, 어머니 도로시 밴 도렌은 소설가. 큰아버지 칼 밴 도렌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전기 작가이자 문학평론가였다. 이러한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찰스 밴 도렌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천체물리학과 영문학을 공부했고, 훗날 모교의 영문학 강사로 일했다. 이후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퀴즈 쇼 스캔들'인 <트웬티 원>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수년간 칩거하다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편집자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오랜 기간 저술가 겸 편집자로 활동하며 여러 권의 교양서를 펴내 호평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진보의 이념>(1967)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How to Read a Book)>(1972) <독서의 즐거움>(1985) <지식의 역사>(199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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