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내가 열다섯 살, 황재하가 열두 살 때였어요. 난 그때까지도 어른이 되면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몰랐어요. 형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공부에서 머리 처박고 장부만 들여다보거나, 상서성에서 매일 공문 초안만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죠. 사람들은 형님들이 출세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이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어떻게 이 좋은 시절을 관청 안에서 붓만 쥐고 산단 말이에요. 안 그래요? 그렇게 인생에 대해 고민하며 갈팡질팡할 때 황재하가 나타난 거예요!" 달을 올려다보는 주자진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153)
<잠중록>을 책 소개하는 곳에서 접했다. 제목이 특이하고 처처칭한이란 작가의 책이 궁금했다. 인기가 있다고 하니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빌려보게 되었다. 영어로는 제목이 <Hairpin>으로 되어 있다. 책을 읽으며 왜 Hairpin으로 제목을 정했는지 알게 되었다. 몇 페이지를 읽자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계속 볼 수밖에 없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버스에서 4시간 내내 페이지를 넘겼다. 눈이 피곤하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궁금해서 펼치게 되는 그런 몰입감 있는 소설이다.
황재하라는 소녀가 셜록 홈즈처럼 상황을 파악해서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찾는 재주가 있다. 하지만 이 소녀는 온 가족을 독살했다는 누명을 쓰고 촉에서 장안으로 도피한다. 남장을 하고 도망하는 상태에서 왕족인 이서백과 우연히 만났다. 황재하 못지않게 탁월한 기억력과 분석력을 가진 사람이다. 황재하가 사건을 해결하는 것을 보고 환관을 시켜준다.
1권에서는 이서백의 부인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왕 씨 가문을 지키려는 자들이 벌인 연이은 살인사건에 대한 추리 과정이 주된 내용이다. 이서백은 황재하가 이 사건을 해결하면 촉으로 가서 황재하 가족의 죽음에 대한 것을 파헤치도록 돕기로 한다. 결국 황재하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개개의 사건들을 이어 맞추면서 누가 범인인지 지목한다.
하지만 범인인 것을 자백했으면서도 황제는 바로 죽도록 하지 않고 살려주어 황재하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된다. 다행히 주인공은 이 위기를 벗어난다. 이서백이 주위에서 늘 지켜주고자 하는 모습도 보인다.
황재하의 정체를 모른 채 황재하와 함께 일하는 시체 검시의 달인 주자진이 있어 이야기가 더욱 흥미롭다. 주자진이 시체를 다루는 부분을 묘소한 것을 읽으며 독자는 상상을 한다. 상상만으로도 축축하고 진흙 같은 썩은 시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실제 이럴 수 있을까 싶다. 지금도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지만 죽은 몸을 마주하는 것을 부담스럽다. 더구나 시간이 지나 부패한 시신은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소설 속에서 주자진은 물속에 들어가 목이 잘린 여인의 시체를 담담하게 보고 황재하에게 알린다. 내가 만일 물속에서 본다면 기절할 것 같다. 끔찍하다.
잠중록 2권이 기대된다.
■ 저자: 처처칭한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바링허 세대로 쌍둥이자리.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깊이 파고들지 못하고, 꽃 키우는 걸 좋아하지만 억울한 죽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옛 지도를 보며 고대도시의 모습을 마음껏 상상하는 것이 취미다. 가슴에 품은 유일한 꿈은 방 안에 여유롭게 앉아 10년을 글을 쓰며, 100가지 사랑 이야기와 1,000년의 역사를 독자들의 마음에 전하는 것이다.
주요 작품으로 <용을 주웠다>, <포말하우트>, <한여름의 장미>, <달빛 흐르는 그해>, <천 가지 얼굴의 천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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