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때로 우연히 좋은 책을 만납니다. <남아 있는 나날>은 주말에 포항에서 서울로 오는 버스 안에서 읽기 위해 회사 서재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고른 책이었습니다. 여러 소설 중에 제목에서 뭔가 과거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것 같고 저자가 일본 사람이라 뭔가 치밀한 이야기를 기대했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5살에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가서 영국 소설가가 된 일본계 영국인이었습니다.
영국의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슨이 그 집을 새로 인수한 미국인 패러데이씨의 허락을 받아 주인의 차인 포드를 몰로 6일간 여행을 하면서 벌어지는 일과 과거의 삶에 대한 스티븐슨의 감상이 서로 얽혀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사색의 결을 살린 특유의 문체에 인간과 문명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담고 있으면서도 감동과 재미로 읽힌다'라는 서평이 있는데 전적으로 공감되지는 않았습니다. 소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집사라는 직업이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아 소설 초기에는 어색하지만 달링턴 홀에서 여러 손님들의 방문을 준비하는 과정과 손님들을 시중드는 역할을 통해 집사란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고 철저하게 주인의 입장에서 품위를 유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전형적인 영국의 예절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는 집사인 스티븐슨이 집과 함께 미국인 주인 페러데이를 모시게 되었을 때 페러데이 씨의 말과 태도에 스티븐슨이 당황하는 면에서 드러난다. 어쩌면 미국과 영국의 문화적인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줄 모르고 읽게된 책입니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가면서 이렇게 집사의 시각으로 시대상을 반영하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에 대한 인식, 직업에 대한 지식, 사회에 대한 변화를 모두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 책을 읽다보면 내가 소설가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시작할까 상상해봅니다. 결국은 소설의 뼈대를 만드는 것과 뼈대를 조금 더 세분해서 잔뼈까지도 잡아놓고 글을 써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아 있는 나날>이라면 주인공과 시대적 배경을 어디로 할지 정하고, 여행이란 큰 뼈대를 넣고, 각 지명마다 소소한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를 삽입하는 식으로 하지 않았을까요. 아마추어의 생각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서 '집사'란 역할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집사에 대한 아래와 같은 정의한 것이 2대째 집사를 하고 있는 스티븐슨의 신념일 것입니다.
'진정으로' 저명한 가문과의 연계야말로 '위대함'의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이 생각하면 할수록 명백해지는 것 같다. 자신이 봉사해 온 세월을 돌아보며, 나는 위대한 신사에게 내 재능을 바쳤노라고, 그래서 그 신사를 통해 인류에 봉사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위대한' 집사가 될 수 있다.
집사의 의무는 훌륭하게 봉사를 하는 것이지 중대한 나랏일에 끼어드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집사 바로 아래에서 총무를 보는 켄턴 양과의 협업과 갈등도 재미를 더합니다. 켄턴 양은 비록 집사 아래에 있는 직업이지만 자신의 역할과 자신의 생각에 대해 거리낌 없이 집사에게 얘기합니다. 유대인 하녀 둘을 해고해야 했을 때도 강하게 반대의견을 보입니다. 이런 부분은 현재 대한민국 직장에서 일어나기 힘든 상황입니다. 상명하복이 아직까지 익숙한 문화입니다. 켄턴 양이 자신의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과감하게 그만두지는 못하는 한계는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켄턴 양이 스티븐슨에게 비쳤던 당돌함은 감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켄턴 양이 벤 부인이 되어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곳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이 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주고받는 말과 눈물은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현실에 대한 순응을 보여줍니다.
"옳은 말씀이에요. 벤 부인. 말씀하신 대로 시간을 돌리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요. 그런 이유들 때문에 당신과 부군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나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겁니다. 당신도 지적했듯 우리는 '지금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중략) 나는 버스가 정차한 뒤에야 켄턴 양을 힐끔 쳐다보았는데 두 눈이 눈물로 얼룩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계급과 형식을 중요시하는 영국사회와 자유분방한 미국 사회를 보여주는 것이 농담에 대한 반응입니다. 스티븐슨이 페러데이가 하는 농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당황합니다. 그리고 여행의 막바지에 아래와 같이 자신도 소통을 위해 농담을 하려고 변하고자 합니다. 변해가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스티븐슨의 변신 노력이 성공할까요.
내가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들은 서로 우스갯소리를 주고받고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바로 저런 거구나 싶다. 어쩌면 좀 전에 내 옆에 앉았던 노인도 나와 농담이나 주고받으려 한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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