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의 책 <침묵의 나선>은 대한민국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한 달 정도 앞둔 시점에 시의적절한 주제인 '선거, 여론과 언론'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다른 책에서 소개된 책이어서 찜해두고 있다가 이제야 내용을 접했다.
장기적으로는, 관습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법은 유지될 수 없다. 사람들의 행동에 보다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명백하고 형식적인 법보다는 고립의 두려움, 주변의 반감을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은연중에 내포된 신호와 같은 것들이다. (241)
책의 내용이 1980년 이전의 독일의 사례를 많이 담고 있어 독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어렵다. 글이 잘 읽히지 않아 번역의 문제인지 원본의 문제인지 약간은 불만이 있다. 가족에게도 소리 내서 읽어보라고 했더니 무슨 말인지 집중이 잘 안 된다고 유사한 목소리를 낸다. 간혹 번역의 부족함으로 원본에 대한 인상이 나빠지는 경우가 있다.
"정부는 여론을 기초로 한다."는 데이비드 흄의 명제와 루소가 국가 내에서 여론에 부여했던 대단한 지위, 미국에서 여론의 압도적인 힘 등, 이 모든 것들이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여론의 대표자임을 자처하도록 부추겼음에 틀림없다. (176)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스스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험을 해보면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며 자신의 지각을 왜곡하며 의견을 타인과 동조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의 고립, 여론으로부터의 고립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침묵의 나선'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관심을 체계화하고 이슈를 선정하는 것이 여론 형성 과정의 한 단계로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며, 다른 어느 법정보다 이 이슈 선정의 임무를 책임지고 있는 대중매체의 중요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이 결과에 따르면 대중매체가 이슈들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연구자들이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표현이 바로 의제 설정 기능 agenda-setting function이다. (286)
시대에 대한 감각을 연마하고 동시에 여론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선명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힘써 도달할 가치가 있는, 그것을 위해 단련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가 될 것이다. (...) 왜 헤겔은 "자기 시대가 말하고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고 자기 시대가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시대의 위인이다." 라는 말로 시간이라는 요소를 절박하게 지적했던 것일까? (335)
그리고 여론에 대한 설명과 함께 사람들이 정보를 습득하는 통로가 개인적인 직접 경험과 언론에서 보도하는 정보로 제한되기에 언론의 어젠다 세팅이 아주 중요하다는 내용이 눈에 쏙 들어왔다. 지금은 SNS가 발달하고 유튜브가 큰 역할을 하기에 언론의 역할이 많이 쇠퇴했다. 하지만 여전히 스마트폰을 통한 정보 습득보다는 주요 TV채널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계층에게는 언론의 보도가 여론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교훈을 주고자 하는 군주들에게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본성을 완벽히 알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백성의 힘은 군주가 백성의 요구에 둔감할 때 군주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를 타도하는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125)
"이 세상의 여왕인 여론은 왕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다. 왕들 자신이야말로 그녀의 첫째가는 노예다."라는 루소의 말은 "정부는 오로지 여론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다."는 데이비드 흄의 말과 맥락을 같이 한다. (244)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 왜 정치인들이 언론을 장악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어젠다를 내보내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런 욕심이 있더라도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는 자제하고 공정한 어젠다를 제시하고 찬반이 있다면 양쪽의 의견을 모두 반영하는 보도가 돼야 한다. 최종적인 판단은 방송을 보는 시청자가 하는 것이 맞다. 마치 언론이 심판관처럼 자신의 이해관계를 개입시키면 안 된다.
책은 어렵지만 한 번 정도는 읽어볼 만한 책이다.
우리는 정상적인 개인이 느끼는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 침묵의 나선 현상에 불을 붙인다고 추정하여, 애시의 실험은 이러한 두려움이 실체적인 것일 수 있음을 사실로 입증해 주고 있다. (86)
(...) 이 두 번째 용법은 언론인의 공적 책임public responsibility이라는 구절이 표현하듯 공익 public interests과 관련이 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관계된 것, 공공복지와 관계된 문제들 혹은 이슈라는 뜻이다. 국가가 합법적으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이 원칙을 근거로 한다. (117)
기존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고립에 대해 개인이 느끼는 두려움과 받아들여지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이미 확립된 의견과 행동에 <동조해야 한다>는, 익명의 법정의 판결만큼이나 중요한 공공의 요구 때문이다. (121)
(...) 그것은 프랑스에서는 마치 종교 전쟁(1562~1589년)의 형태를 띠었다. 몽테뉴는 프랑스에선 어딜 가나 이 종교 전쟁을 피할 길이 없다고, 특히 자신이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는 고향 보르도는 빈번한 충돌로 조용할 새가 없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사회 분위기와 각 진영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했고 거기에 자신의 행동을 맞춰야 했다. (128)
시대 상황에 따라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몽테뉴가 살던 시대에는 사회 분위기를 살피고 맞춰야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내가 아는 한, 토크빌은 침묵의 나선이 작동하는 것을 명확히 관찰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혁명이 일어나기 전 프랑스 교회가 쇠퇴하는 과정을 예로 들면서, 여론과 관련해서 말을 하거나 침묵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회 있을 때마다 언급했다. 나아가서 여론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관찰에 의한 실증적 조사와 가장 밀접해 있다. (166)
존 로크의 여론, 평판, 유행의 법은 인간의 행동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관습, 공중의 도덕 같은 현대의 사회학 용어의 범주에서 찾을 수 있다. (237)
존 로크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는 행동의 근원을 찾아간다면 결국은 여론을 의식하고, 평판을 추구하며, 시대의 유행을 벗어나기 어렵다.
1799년 독일의 시인이자 역사가인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은 <괴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258)
그것은 독으로 인해 부풀어 오른 듯 보였고, 속이 다 비치는 그 살갗에는 온갖 색깔이 일렁거렸으며, 그 내장은 흡사 벌레처럼 꿈틀대는 게 다 보였다. 그것은 공포를 자아낼 만큼 덩치가 컸고 온몸에 사방으로 돋아 있는 게처럼 생긴 집게발을 접었다 폈다 했다. 이제 그것은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세 수 없이 많은 발로 혐오스러울 정도로 민첩하게 움직여 기어가기도 했다. 나는 겁에 질려 돌아섰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쫓아오려고 했기 때문에 나는 용기를 내서 그 괴물의 등을 주먹으로 힘껏 후려쳤다. 그러자 갑자기 그것은 그저 내 눈에 평범한 개구리로 보였다. 바로 그때 누군가 내 뒤에서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여론이라는 겁니다......"
여론은 거대하고 무서운 존재로 다가와 우리에게 겁을 준다. 하지만 실체를 알았을 때는 너무나 평범한 '여론'에 대해 아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마음속에서 여론은 무한증식해서 괴물로 변할 수도 있다.
스테레오타입은 원래 인쇄할 때 사용하는 금속판의 한 종류인 연판을 뜻하며 연판 인쇄를 스테레오타입 인쇄라고 한다. 조판한 것을 원판 그대로 인쇄하는 방식을 원판 인쇄, 조판한 것으로 지형을 뜨고 여기에 납물을 부어 연판을 만들어 인쇄하는 방식을 연판 인쇄라고 한다. 따라서 연판 인쇄, 스테레오타입 인쇄는 <고정된 똑같은 내용>을 계속해서 인쇄해서 퍼뜨릴 수 있는데 여기서 <고정관념>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스테레오타입을 처음으로 고정관념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사람이 월터 리프먼이다. 이때 고정관념이란,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집단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비교적 고정된 견해와 사고를 말하는데 대개의 경우 뚜렷한 근거가 없고 감정적인 판단에 의거하고 있다. (268)
사람들은 인지부조화를 피하고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세계에 대한 조화로운 이미지가 계속 유지되게 하려고 적극 노력한다. 인지의 복잡성을 줄여야 한다는 필요성에 이어서 선택적 지각은 현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보도함에 있어 피할 길 없는 또 하나의 왜곡의 근원이 된다. (274)
미디어 문화는 미디어가 이 세계에서 취사선택해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문화이며 실제 세계는 우리의 눈길이 닿지 않고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기에, 통상 우리가 보는 세계는 오로지 미디어에 의한 세계뿐이다. (279)
1979년 10월, 노벨상 수상자인 마더 테레사 수녀의 다음과 같은 성명이 즉각적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유명해졌을 때 나는 우리 시대가 인류의 민감한 사회적 본성을 자각하고 존중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자문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병은 나병도 아니고 폐결핵도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 모두에게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입니다." (336)
독서습관 850_침묵의 나선_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_2016_사이(240312)
■ 저자: 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 커뮤니케이션 학자로, 베를린 대학을 졸업하고 8년간 신문기자로 일했으며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여론 조사 기관인 알렌스바흐 연구소를 설립하고 세계여론조사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를,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마인츠 대학 저널리즘 연구소 소장을 지내기도 했다.
특히 1972년 도쿄에서 열린 세계심리학회에서 여론 형성 과정을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침묵의 나선 이론Spiral of Silence Theory을 발표해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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