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흥미를 느낀 것은 가집 제목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만, '축축한 땅 위 도도하게 선 저 유리 갈대. 대롱 속에는 바슬바슬 모래가 흘러가네'라는 한 수입니다. 여기에는 성애를 나타내는 단어도 없고, 자신이 한 알의 모래가 되어 흘러가는 듯한 허무함은 여자라면 누구나 갖지 않나요? 일종의 보편성이 느껴진달까. (44)
번역가 권남희의 책 <혼자여서 좋은 직업>에 그녀가 번역한 여러 작품들이 소개되는데 그중에 하나인 사쿠라기 시노의 책 <유리 갈대>를 읽었다. 사쿠라기 시노라는 홋카이도 구시로라는 고향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주로 썼다. 그리고 어린 시절 부모님이 호텔을 운영할 때 도와줬던 경험을 바탕으로 <호텔 로열>과 <유리 갈대>를 썼다. 이런 작가의 개성 때문에 그녀의 책이 궁금했다.
주인공 쎄쓰코는 호텔을 운영하는 고다 기이치로의 세 번째 부인이다. 쎄쓰코의 엄마는 고다 기이치로의 부인이었다. 고다 기이치로의 다른 부인으로부터 얻은 딸은 쎄쓰코와 연배가 비슷하다. 쎄쓰코의 남편은 고다이지만 내연남은 고다가 알고 있는 사와키다. 여기까지만 언급해도 머리가 혼란스럽고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윤리관이나 결혼관으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쎄쓰코는 남편과 함께 호텔을 운영하는 일 이외에는 단가 모임을 통해 사람들과 교제하는 시간을 갖는다. 단가 모임에서 만난 미치코와 그녀의 딸 마유미는 새로운 이야기 전개를 예고하고 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시기에 남편인 고다 기이치로가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의 상태가 된다. 연이어 미치코가 자신의 딸 마유미를 맡기며 평범한 일상은 끝이 난다. 말없는 아이 마유미 가족의 정체가 드러나고, 내연남인 사와키는 늘 산전수전 다 겪은 주인공 쎄쓰코를 돕는다. 쎄쓰코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담담하다.
소설 속에서 미치코와 마유미 가족의 등장은 쎄쓰코에게 어떤 의미일까. 약간의 긴장감을 주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단가집 제목 '유리 갈대'의 내용처럼 한 여인의 삶의 허무함을 보여주기 위한 한 가지 장치였을까. 아마도 저자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만들어진 인간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여자의 일생을 '허무함'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서습관 772_유리 갈대_사쿠라기 시노_2016_비채(230830)
■ 저자: 사쿠라기 시노
1965년 일본 홋카이도 구시로 시에서 태어났다. 중학생 때 홋카이도 출신 작가 하라다 야스코의 <만가>를 읽고, 평소 무심히 마주한 풍광도 작가의 눈을 통하면 이렇게 근사할 수 있구나 감탄하면서 문학에 눈을 떴다. 고교 시절에는 문예반에서 활동하는 등 문학과 함께 성장했다.
졸업 후에는 법원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했다. 스물네 살에 결혼과 동시에 퇴직하고 남편의 전근을 따라 홋카이도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전업주부로 살았다. 둘째 아이를 출산한 뒤, 하라다 야스코가 과거 동인으로 활동한 문예지 <북해문학>에 참여, 습작을 시작하면서 다시금 문학을 향한 꿈을 꾸었다.
2002년 <설충>으로 제82회 올요미모노신인상을 수상했고, 2007년 소설집 <빙평선>을 발표함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에 이른다. 2012년에 발표한 <러브리스>로 제19회 시마세연애문학상 및 제41회 구시신향토문예상을 수상했다. 신인상 수상 이후 십여 년 만인 2013년, <호텔 로열>로 제149회 나오키상의 영예를 안았다.
대다수의 소설이 작가가 나고 자란 홋카이도, 그중에서도 구시로 시를 주무대로 삼고 있는 만큼, 2014년부터는 구시로 시 홍보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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